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며
우리 가족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전동 휠체어를 타신 분이 계신다. 그분은 비록 두 다리는 쓰지 못하시지만 남다른 손재주를 가지셨다. 지난겨울 어느 날, 귀여운 아기들 겨울모자를 선물로 주셨는데 직접 손으로 뜨신 거라 하셨다. 그 분과 친해지고 싶었고, 또 뜨개질도 배우고 싶은 마음에 가르쳐 달라 부탁을 드렸고 그날부터 뜨개질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우리는 매주 한 번 마을의 커뮤니티센터에서 만났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면서 동네 아기 어머니 두 분이 더 찾아오셨다. 시작은 내가 일번 이었으나 진도는 꼴찌가 되었다. 첫 번째 실험대상으로 우리 첫째 봄이에게 겨울 조끼를 입혀보겠노라고 호기롭게 시작은 하였으나 겨울은 지난 지 한참이 되었고, 펄펄 끓는 여름 한복판에 왔을 때 겨우 마무리를 짓는다. 아이고.. 더워서 못 입고, 어느새 커버려서 못 입는 거 아닌가 싶다. 그래도 애써 만들었으니 마침 지나가던 봄이를 붙잡고 환하게 웃으며 강제로 입혀 본다. "오 아빠 이쁜데~" 그렇게 한 마디로 그간의 수고에 대한 치하를 마친 봄이는 조끼를 벗어던지고 나비처럼 날아 시선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서 입으면 되지 뭐 하러 힘들게 손뜨개를 해요?
그렇다. 사실 이런 일은 효율적이라 볼 순 없겠다. 더 싸고, 더 다양한 옷을 아주 쉽고 빠르게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내가 손뜨개를 달팽이 걸음으로 배우고 시간을 쓰는 이유는 분명 그 때문이 아니다. 나는 달리는 자동차에게 도전하거나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뜨개질을 배우며 새롭게 다가온 점들이 있다. 이 옷을 입힐 아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처음에는 어떤 색이 잘 어울릴까.. 에서부터, 우리 아이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나 싫어했나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하고, 조금 더 지나면 팔 길이가 어디까지 정도 인지, 허리둘레가 어느 정도 될지도 가늠해 본다. 아이의 표정, 분위기, 팔과 몸에 대해서 떠올리다 보면, 그리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큰 거 같은 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이 아이가 커서 어떤 모습일지 까지도 상상해 본다.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도.
그러니 내가 뜨개질을 하며 -아마 내 앞에 거울이 있다면 - 거울에 비추어진 내 모습은 아마도 멍하니 미소를 짓기도 하고, 진지해지기도 하고, 무거운 그림자가 질 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뜨개질을 하는 아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오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아이들에게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다.
Winter is coming. 겨울이 오고 있다.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유명한 대사가 떠오른다. 이미 우리는 겨울을 살고 있다. 인생으로 보자면 누구나 겨울은 찾아온다. 문제는 겨울에 우리는 겨울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이다. 멈춰 있을 수 없고 결국 살아내야 한다. 정말 혹독한 겨울은 아직 오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모두에게나.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겨울 외투 한벌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할머니가 지어 주신, 어머니가 지어 주신 겨울 외투. 나를 위해 한 땀 한 땀 바늘을 꿰어지었을 겨울 외투 말이다. 따스한 난로가에 앉아 가족의 품 안에 놓인 우리 아이들은 언젠가 현관문을 열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세상으로 나가겠지. 내가 그 아이들이 될 수 없는 법. 그 아이들의 삶을 살 수도 없는 법. 살려고 해서도 안 되는 법. 너로 살아라. 너의 삶을 걸어라. 눈보라 치는 세상으로 나가라. 아빠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겨울 외투 한벌 지어 걸쳐 주는 것이어야 할 테다.
어쩌면 나는 나름대로의 겨울을 준비하는, 떠나보냄의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괜히 참견하지 말고 내 주제를 잘 알고, 이 정도 하는 것에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