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조직 문제 5.
원 팀장은 매주 본부장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데, 항상 방 대리에게 초안을 맡겼다. 초안이라고 하지만 늘 방 대리의 보고서를 그대로 본부장에게 올리곤 했다. 이번에도 원 팀장이 방 대리에게 부탁(?)을 하는데, 방 대리가 못 참고 이야기했다.
“방 대리, 주간 업무 보고 부탁해.”
“팀장님, 죄송한데 매번 제가 이 작업하는데요, 제가 왜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방 대리 무슨 말이야? 이거 시간 얼마나 잡아먹는다고, 하기 귀찮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제가 할 일이 아닌 거 같아서요.”
“아니, 그래서 내가 항상 부탁하잖아. 방 대리, 지금까지 본부장님한테 한소리 들은 적 없지? 그거 왜 그랬을 거 같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케어해 줬는데! 됐어, 앞으로 보고서 작성하지 마.”
그 이후 보고서 작성은 여 주임 몫이 되었다.
여 주임은 회사생활을 시작한 지 3년이 채 안 됐다. 하지만 그동안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날은 너무도 많았다. 팀장과 너무 안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 주임은 큰 결심을 하고 원 팀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팀장님, 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냥 좀 쉬려고요.”
“뭐 어디 갈 데 있는 건 아니고?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봐. 여 주임 일도 이제 많이 능숙해지고 좋아졌잖아.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래? 업무 좀 줄여줄까?”
“아뇨. 그냥 쉬면서 운동도 하고 여행도 좀 다니려고요.”
“에, 뭐 아직 계획도 세운 거 없는 거 같은데. 지금 여 주임 경력 3년도 안 됐잖아. 안타까워서 그래. 경력이 지금은 좀 애매해. 한 1, 2년만 더 배우면 오라는 데도 많을걸!”
“그냥 그만둘게요.”
“대체 뭐가 불만인데? 어? 여 주임 경력이면 납작 엎드려서 일 배울 생각을 해야지. 지금 나가면 어디 갈 데는 있을 거 같아?”
회사에 있다 보면, 일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일이고, 어떤 일은 내 권한으로 진행할 수 있고, 어떤 일은 팀장에게 컨펌을 받아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간혹 선을 분명하게 나누어주는 팀장도 있지만, 대부분은 팀원이 눈치껏 선을 밟지 않고 일하기를 바란다. 나도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이 정도까지는 나 혼자 진행해도 되겠지 생각하고 일을 했더니 나중에 크게 낭패 본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일일이 팀장에게 컨펌을 받았는데, 팀장도 그걸 좋아하는 눈치였다.
어떤 팀장은 팀원이 스스로 일하기를 바라고, 어떤 팀장은 팀원이 일일이 확인받으며 일하기를 바라고, 어떤 팀장은 그때그때 마음이 달라 이건 확인받지 않아 화를 내고, 저건 굳이 확인받는다고 화를 낸다. 게다가 일의 경계가 모호하다 보면, 이건 누가 봐도 팀장이 해야 할 일 같은데 팀원에게 업무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특히 팀장이란 직함만 달면 사소하다 생각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팀장들이 있는데(그렇다고 큰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팀장은 팀원에게 자신의 일을 당연하다는 듯 떠넘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소소한 일이나 잡무를 팀원에게 전부 떠넘기는 팀장일수록 ‘난 정말 괜찮은 팀장이야. 나처럼 팀원에게 잘해주는 팀장이 어딨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자신이 떠넘기는 일을 팀원이 거부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감히 나한테?’라며 배신감을 느낀다. 실상 팀원을 케어해 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라. 그동안 팀장의 일을 대신 해주었던 팀원이 팀장을 케어해 준 것이지, 팀장이 한 일은 없다. 팀장이 케어해 줬다는 건 본부장이나 이사급의 상사가 “팀원들은 일 잘하고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예,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을 말한다. 내가 상사에게 팀원 욕을 하고 싶은데 그걸 꾹 참고 잘하고 있다 했으니 그것으로 나는 얼마나 팀원을 케어해 주고 있는 건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일을 거부한 팀원을 케어해 주지 않겠다 다짐을 하는데, 이건 그동안은 네가 못마땅해도 참고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사소한 잘못만 있어도 갈구겠다라는 소리다. 막상 팀장이 케어해 주지 않아도 팀원이 겪는 고통은 팀장의 갈굼뿐이지 다른 상사에게 받는 눈초리 같은 건 전혀 없다.
나는 전에 팀장과 본부장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본부장이 나한테는 한소리 한 적 없다는 말을 했더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막아줬는데! 그걸 모르네!”라는 말을 들었다. 아니, 본부장이 나한테 총을 쏘는 것도 아니고 뭘 막아준다는 건지, 본부장이 정당한 지적을 하면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고 부당한 지적을 하면 당당히 거부하면 될 것을, 착각하고 있는 팀장이 많다.
그리고 케어하고 막는다는 팀장들은 괜한 말을 전하곤 한다. “그때 본부장님이 너 일 못한다고 막 욕을 했어. 근데 내가 말했지. 아니다. 우리 팀원은 그렇지 않다. 지금 배우고 있는 과정이라 조금 느릴 뿐이지 아주 꼼꼼하게 잘하고 있다. 그랬더니 본부장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니까.” 따위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전한다. 오로지 나의 치적을 위해서, 내가 팀원을 케어해 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을 전하는 것뿐이지, 이야기를 들은 팀원이 기분이 얼마나 나쁠지 자존감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관심도 없다(나는 특히 “누가 너 실력이 없대. 지는 더 실력이 없으면서 누가 누구한테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처럼 편드는 척하면서 남의 말을 굳이 전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아무튼 나는 막아준다거나 케어해 준다거나 따위의 소리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상사가 내 욕을 하더라도 그걸 굳이 전하지 않는 팀장에게 케어받는 느낌을 받는다.
팀장님, 저 그만두겠습니다!
팀장과 너무 맞지 않아서, 혹은 팀장에게 너무 갈굼을 당해서, “팀장님, 저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은 어쩌면 아주 짜릿한 순간이다. 그동안 팀장과의 관계에서 객체로 살아왔던 팀원이 처음으로 주체가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팀원을 케어한다고 생각하는 팀장은 대부분 팀원이 그만둔다 했을 때 원 팀장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팀원이 그만두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팀원을 붙잡기도 한다. 아무리 회유를 해봐도 팀원의 의지가 굳건하면 갑자기 화를 낸다거나 ‘네가 감히’라는 반응을 한다. 나는 항상 팀원에게 잘해주는 팀장이어야 하기에 팀원이 별 이유 없이 그만두는 데에 배신감을 느끼는 거다. 급기야 “네가 어디 갈 데가 있을 거 같아?”라는 말로 마무리 짓는다. 이 말은 어딘가 어록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내 주변 직장인이 회사를 관둘 때마다 들었던 소리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회사를 나온 직장인은 다들 더 좋은 데로 이직했다.
어떤 팀장은 팀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 팀원을 보직 변경시켰는데, 보직 변경된 팀원은 나와 맞지 않는 일을 할 수도 없고 ‘이건 나가라는 소리구나’라고 생각해 회사를 그만둔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팀장은 “보직 변경했다고 바로 나간다고 하냐”며 크게 화를 낸 일도 있었다.
팀원이 그만둔다고 하면 곱게 보내주면 될 것을 팀장은 왜 화를 내거나 저런 발언을 하는 걸까? 그건 팀원과의 관계에서 항상 주체였던 팀장이 객체가 되는 걸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팀장은 내가 먼저 팀원을 자르거나 혹은 쫓기듯 나가게 해야 하는데, 팀원이 먼저 주체가 되어 그만둔다고 이야기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내 기준으로는 내 보살핌을 더 받아야만 능력을 가질 수 있는 팀원인데, 감히 나가니 나가서 갈 데는 없다는 험한 소리를 한다. 하지만 정작 팀원의 능력을 몰랐던 건 팀장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만두는 순간에 비로소 주체가 된 팀원은 다른 회사에 가서 능력을 인정받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