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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Aug 07. 2023

운수 運數

병수는 매주 복권을 한 장씩 산다. 복권이 당첨되길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그런 행운이 맞아떨어질 확률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매주 한 장 복권을 사는 이유는 공짜로 꿈을 꾸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복권 한 장 구입조차 하지 않고 당첨의 꿈을 꾸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라며, 더욱이 그가 꾸는 꿈은 인생역전도 일확천금도 아니라고 손짓발짓 다해가며 설명했다. 아무려나 복권 한 장이라도 사놓아야 부질없는 확률이나마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일 테니 그런 면에서라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낭만이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병수는 행운이나 기적 같은 말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너무 일찍 알게 된 세상은 자신 같은 나부랭이에게 행운이 돌아올 만큼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물론 그에게도 복권이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에서 꿈을 꿀 수 있는 기회이자 숨 쉴 구멍임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물며 하루가 특별히 고된 날이면 가끔씩 그도 당첨에 대한 기대가 깊어질 때가 있지만 그럴 때조차 스스로 허황된 기대를 매조지하려 애쓰곤 했다.


그러니까 병수가 복권을 사는 이유는 이왕이면 당첨이 되면야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애써 당첨을 바라서가 아니라 꿈을 꾸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천 원어치 꿈꿀 기회를 산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그래서 가능한 오랫동안 꿈꿀 기회를 갖기 위해 그는 추첨일 다음날 복권을 사곤 한다. 그런 그에게 '당첨되기를 바라지도 않을 거면, 뭐 하러 돈 아깝게 복권을 사냐'고 그의 아내는 핀잔을 주곤 했다. 일리 있는 얘기다. 그렇지만 병수에게는 어차피 크게 있지도 않은 기대이지만 곧이어 벌어질 실망에 대비하는 연막 장치이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그 역시 사람인지라 가끔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허황공상이 펼쳐지곤 했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사고가 난 차량을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노인네를 구조하거나 또는 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해주었더니 상당한 재력을 지닌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거액을 받는다거나, 아니면 운전을 하고 가는데 누군가가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며 차 안으로 돈가방을 던지고 달아난다거나 뭐 이런 식이다. 복권만큼 현실성이 없는 허황된 망상인 줄은 알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이벤트가 아닌 줄 알고 있기에,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인 공상이자 꿈인 것이다. 그나마 복권처럼 돈 드는 공상도 아니었다.


그는 오늘도 복권을 한 장 샀다. 자주 들르던 버스정류장 앞 편의점이 개인 사정이란 이유로 이틀 동안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번엔 길 건너편 천변 산책로 입구에 있는 복권방에서 구입했다. 편의점 사장이 휴가를 간 것인지 몸이 불편한 것인지 아니면 상이라도 당한 것인지 개인 사정이라니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천변 산책로 입구에 있는 복권방은 두 번의 일등 당첨자를 배출한 이후 늘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복권을 구입하는 명소가 되었다.


복권이란 게 그렇다. 한 번 당첨이 소문이 나면 구매자가 늘고 그런 만큼 당첨자가 나올 확률이 올라간다. 그러다가 또 한 번이라도 당첨자가 나오게 되면 창졸간에 복권 명당이 된다. 하지만 복권을 구입하는 개개인의 확률은 실상 어느 판매점에서 구입하든 변하는 게 아니다. 다만 늘어나는 판매량 덕택에 판매점에서 당첨자가 나올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는 꼴이니 결국 돈 잃은 사람들이 명당을 만들어 주는 형국이고, 정작 업주의 수입만 불려주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 그도 두어 번 이곳에서 복권을 사봤었다. 하지만 역시나 꽝이었고, 게다가 끊이지 않고 복권을 사겠다고 줄 서는 사람들 사이에 같이 서 있는 것도 적잖이 불편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달랑 복권 한 장 주문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아 그 이후로는 찾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별 수없이 십여 분을 줄을 서서 복권 한 장 손에 쥐었다. 몇 만 원씩 구매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말없이 오천 원 한 장을 내미니 업주도 고개를 들어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동으로 한 장 뽑아서 건넨다. 병수는 건네받은 복권 종이를 손에 쥐고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깜박이는 파란 신호등의 건널목을 재빨리 건넌다. 손에 쥔 번호를 무심한 듯 한 번 쓰윽 흝어보고는 이내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둑을 따라 늘어선 길을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천변 옆으로 올라 선 긴 이름의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니 어느새 사 차선 도로 주변에는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이 한적해졌다. 그때 갑자기 반대편 도로를 달리던 검은색 고급 승용차 - 벤츠라고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 - 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함께 중앙선을 넘어와 가로수를 들이받고 둑방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바로 눈앞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병수는 깜짝 놀란 마음에 사고 난 차량을 내려다보니 차량은 천변 산책로 옆으로 뒤집어져 처박혀 있었다. 찌그러진 보닛 덮개 틈 사이로 희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운전석 쪽 문도 찌그러져 있었다. 그때 조수석 문이 힘겹게 열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차에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병수는 따질 겨를도 없이 뚝방을 내려서 사고 차량으로 달려갔다. 조수석에는 한 노인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는데 하반신은 운전석에 걸친 것으로 보아 직접 운전하다 사고를 당한 모양인 듯싶었다. 그는 주저 없이 달려가서 안전벨트를 풀고 노인을 끌어안아 차 안에서 끄집어냈다.


노인은 곧바로 눈을 뜨긴 했으나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괴로워했다. 얼핏 보아서는 큰 부상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연세와 사고의 규모를 감안하면 어떤 상태인지 일반인이 쉽게 판단할 바는 아니었다. 일단 사고 난 차에서 벗어나 둔덕 중턱까지 노인을 옮긴 그는 허리를 펴며 이마에 맺힌 땀을 팔꿈치로 닦아냈다. 마침 바람이 이마를 스치며 약간의 서늘함을 느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는지 노인은 자세를 고쳐 앉으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그가 다시 허리를 숙여 노인의 어깨와 허리를 고쳐 세워 주었다.


그때 노인이 입을 열었다.


"위험한데.... 구해줘서 고맙네 젊은이."


그는 그런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더 살 수 없을 듯하네."


심하게 기침을 쏟아 낸 노인이 말을 이었다.


"자네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젊은이에게 좋은 일을 해야겠네. 저 차 트렁크에 현금 실린 가방 있네. 자식들 몰래 기부하려고 가던 참이었는데, 어차피 남 주려고 했던 거, 그거... 자네에게 줘야겠네."


도대체 노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병수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라도 있어야 할 테니 어서.... 휴대폰으로 내 말을 녹음이라도 해놓게."


노인은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힘겹게 말을 이었지만, 병수는 그저 멀뚱히 노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뭐 하나? 어서 내 말 안 듣고?"


하지만 병수는 노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들을 수도 그래서 말을 할 수도 없는 농아인이기 때문이다. 노인의 표정에 놀라 그는 수화로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지만, 그건 노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을 산책하던 누군가가 신고를 한 모양인지 119 구조대의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이내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사고 난 차량과 그들 주위로 달려왔다. 노인은 급하게 달려오는 구조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구조대원들이 서둘러 노인의 상태를 확인하고 들것에 실어 구급차에 옮기는 동안 경찰은 노인의 차량 트렁크에서 커다란 여행용 가방 두 개를 꺼냈다. 뚝방에 걸터앉은 채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병수는 이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다. 현장을 수습하던 경찰이 큰소리로 병수를 불러 세웠지만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주머니에 넣은 복권이  있는지 만지작거리며 천변도로를 향해 올라섰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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