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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지 Feb 10. 2019

아동의 당연한 권리 : 존중과 사랑

영화 <가버나움>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에 흐르던 격정적인 음악, 주인공을 비추는 카메라의 구도에서 영화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카메라가 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집을 자주 비추던 까닭은 이 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개인의 가치관에 영향을 끼치는 환경

아기의 탄생이 모성애와 부성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자식은 기르는 정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자식들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자인의 부모님에게서는 그러한 '정'마저 느낄 수 없었다. 자인의 부모는 본인의 부모 또한 본인들과 같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인공 자인

내리사랑, 약한 존재를 보호하는 마음

부모는 자인에게 사랑과 존중을 주지 않았지만, 자인은 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돈 때문에 어린 여자아이를 다른 집에 보내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그 주체가 부모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자인은 여동생 사하르가 강제로 끌려가기 전에(강제의 주체가 남이 아닌 사하르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사하르와 함께 멀리 떠나버리려 했다. 결국 사하르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고, 자인은 홀로 떠났다. 부모는 더 이상 부모가 아니라는 것, 그 집에서 계속 사는 것은 자인 본인의 삶을 포기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라힐

자인이 집을 떠나 라힐을 만나고, 그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자인은 라힐이 일하러 가있는 동안, 아들 요나스를 돌봐주었다.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를 아끼는 자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라힐이 집을 나가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자인은 자신과 요나스를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택으로 요나스가 라힐과 영원히 헤어질 것만 같았지만, 결국 요나스와 라힐이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너무 귀엽던 요나스, 어쩜 그렇게 귀염뽀짝인지..!! 요나스의 귀여움이 영화의 볼거리를 한 층 높여 주었다.

라힐과 같은 미혼모가 없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 뿐만아니라 남성들도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요나스의 엄마 라힐을 연기한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는 촬영 당시 실제로 외국인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여러분이 보신 게 제 진짜 삶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고 하던 그녀의 모습이 영화만큼이나 먹먹했다.


요나스와 자인



엄마는 감정이 있어요?


서류상에 없는, 이 세상에 존재한 흔적조차 없는 아이들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자식들을 본인의 생계 유지 수단으로 여기는 자인의 부모. 자인의 엄마는 여러 명의 아이를 두고도 또 아이를 가졌다. 자인의 말처럼 곧 태어날 아기는 자인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반면 요나스를 혼자서 기르기 힘들지만 어떻게든 본인의 힘으로 키우고 싶은 엄마 라힐. 영화 속에는 생명을 대하는 태도가 대조적인 두 엄마가 등장한다. 자인은 라힐이 주는 음식을 먹으며 처음으로 보살핌과 따뜻함을 느꼈을 것이다. 라힐이 오랜 시간 집에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인은 요나스를 끝까지 돌봐 주려 노력했다. 요나스만큼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인과 사하르

자인과 사하르를 연기한 자인 알 라피아와 하이타 아이잠은 실제로 출생증명서 없이 살아가던 난민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연기 아닌 연기가 더욱 실제처럼 느껴졌다. 현재 영화 제작진은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하여 영화에 출연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자인과 사하르가 영화 밖에서는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


가족의 의미, 부모의 역할과 자격, 외국인 노동자, 여성 인권, 미혼모..

영화 <가버나움>은 여러 사회적 주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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