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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화 Apr 20. 2023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성숙의 창구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하지 말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비단 술, 담배 같은 것들이 아니더라도 어른의 전유물로 느껴지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들이 더 하고 싶어지고는 했는데, 제게는 넥타이를 매는 일이 그런 일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중학교를 다닐 때 할아버지에게 넥타이를 매는 방법을 배운 뒤로는 곧 잘 할아버지의 넥타이를 매고 돌아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어른 흉내를 낸다며 한 소리 씩 하고는 했죠. 지금에 와서는 갑갑한 사회생활의 상징과도 같이 느껴져 꼭 매야하는 때가 아니면 절대 매지 않습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의 전유물과 같은 상징적인 것들을 하고 있으면 금방 성숙해지고, 어른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따듯한 색 블루’는 저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그런 성숙에 대한 열망의 이야기로도 느껴졌습니다.


아델은 학생이지만 담배를 피우고, 애인과 섹스도 합니다. 그러나 성숙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미성숙해 보입니다. 아직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있고, 곧 잘 혼란스러워하죠. 스스로가 남자를 사랑하는지, 여자를 사랑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 아델에게 엠마는 처음 보는 세계의 어른이었습니다. 고지식하다고 느껴지는 부모님과, 미성숙해 보이는 친구들과는 다른 동경할 만한 멋진 어른이었죠. 순수 미술을 전공하는 예술가 대학생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엠마의 모든 면들은 아델에게 자신이 원하는 성숙하고 멋진 어른의 파편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둘의 관계는 사랑 속에 동경을 내비칩니다. 아델은 엠마의 세계의 일부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엠마의 세계 속에서 엠마와 동등한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엠마의 세계 속 사람들과는 제대로 된 대화도, 어떤 공감대도 형성하지 못합니다. 그렇다 보니 엠마가 해주는 진로나 미래에 대한 조언들에 반감을 느낍니다. 마치 자신을 아이로 대하는 듯 느껴지니까 말이죠.

 

그러나 엠마의 졸업 전시회에서 아델은 마냥 미성숙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고, 사람을 맞이하는 등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줄곧 커리어를 우선에 두던 엠마보다 더 성숙하고 진심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델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 대해 관찰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오직 엠마에 대한 동경과 그녀가 주는 관심만을 쫓기 때문이죠.


아델의 그런 미성숙함은 영화 내내 계속해서 드러납니다. 클로즈업된 곧 잘 벌리고 있는 입은 유아를 연상시키고, 유일하게 관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어른스러움을 드러내던 아이들 앞에서의 수업도 아이들의 연령이 올라가자 버거워합니다. 이런 미성숙함은 엠마에게 받는 관심이 부족해지는 상태가 지속되자 폭발합니다. 엠마의 관심에 대한 갈구를 다른 사람과의 바람을 통해 해결하죠. 그 사실을 알게 된 엠마는 기다렸다는 듯 관계의 끝을 통보하고, 아델은 어쩔 줄 모르는 아이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끝이 나버렸지만 아델은 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아델의 성숙함의 창구는 엠마였기 때문에, 엠마가 없어지자 성숙함을 배우고 표현할 방법을 더는 찾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아델의 무기력함은 해변에서 두드러집니다. 아델은 엠마가 떠오르는 푸른 바닷속에서 무기력하게 떠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표류하는 것 같았죠. 성숙의 지표로 삼은 상대가 없어지자 그 상대로 가득한 마음속에서 헤매고 만 있는 것입니다. 정작 바라봐야 할 것은 그 바닷속에 떠 있는 자신인데 말입니다.

 

엠마의 전시회에서의 마지막 재회에서도, 아델은 한껏 어른스럽게 보이는 머리와 드레스 차림으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 드레스는 아직도 푸른색이었죠.

엠마의 그림 속 색들은 이제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했고, 엠마의 곁에는 새로운 사람이 너무나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아델은 엠마가 다시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끝내 받아들이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엠마의 그림을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림 속 모델인 아델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었습니다. 그녀는 그림 속에서 매력적이고 존재감 있는 모델이었죠. 아델은 한 번도 엠마의 그림에 대해 진중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멋지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죠. 자신이 엠마와 주변의 예술가들만큼 멋지고 성숙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엠마의 그림을 느껴지는 그대로, 깊숙하게 감상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그림을 빛나게 해주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죠. 아델이 집중해서 바라보았어야 할 것은 그림을 그리는 엠마라는 존재가 아니라, 그림 속의 자신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랬다면 엠마가 자신에게 성숙에 대해, 사랑에 대해 알려준 소중한 사람인만큼 엠마에게 자신도 엠마가 예술가로서 더 나아갈 수 있었던 근원인 소중한 사람이었음을 진심으로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그 안에 분명 동경도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성숙하고, 멋진 사람이길 바라고,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스스로가 그렇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성숙을 배우고 표현하는 이유에 그치는 것이 아닌, 성숙의 창구마저 상대방이라면, 그 상대방 없이 우리 스스로 만으로는 표류해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은 어렵고, 성숙해지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나아간다면, 내일은 오늘보다는 좀 더 성숙해지고 더 잘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아델의 뒷모습이 참 슬프게 다가왔습니다. 러닝 타임 내내 다른 사람의 삶을 훔쳐보는 듯 가깝게 촬영한 까닭인지, 아델의 공황적인 울음들에 계속해서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 모습에 어쩌면 누구나 그랬던 그 시절의 제 모습이 보여서였을까요.


끝을 안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델이 이제는 블루를 어른이 된다는 일에 대해 이끌어준 따뜻한 손길의 색으로 간직하고, 자신의 색을 찾아 스스로를 물들이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계속해서 사랑하고 때로는 잃으며, 그 안에서 더욱 성숙해지길, 그렇게 스스로의 색을 찾아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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