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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화 Apr 22. 2023

디태치먼트

서로의 가시를 끌어안으며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온기를 나누기 위해 모인 고슴도치들이 서로를 찌를 수 있는 가시를 경계하며 함께 온기를 나눌 수 있고, 또 가시에 찔려 상처받지도 않을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거리감은 어려운 것입니다. 마치 상처와 추위 사이의 불안한 균형 잡기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없이 위태로운 균형을 잡아보려 애쓰는 것은 기억에 의한 호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누군가로 인해 따뜻했던 기억에 의한 온기의 호소, 그리고 상처의 고통에 대한 기억과 외로움으로 인한 추위의 기억에 의한 자기 방어의 호소 말입니다.


이 영화는 그런 딜레마에 의한 호소입니다. 디태치먼트는 고슴도치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살면서 가장 먼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가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가장 먼저 마주하는 대상이지만, 이상만큼 성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그들에게 가장 먼저 상처받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도 노력하는 가족이라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어떨까요? 계속해서 상처를 주고 그 상처가 덧나도 방치하는 가족 말입니다.  


상처에 지나치게 노출된 아이들은 마음의 경계선과 그 경계선에 대한 방어가 확고해집니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날카롭게 세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상처를 받는 것이 너무도 빈번해 자신을 지키려 가시를 곤두세우지만,  그 가시는 남을 상처 줄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지키는 가시가 향할 곳은 다가오는 타인의 살갗 밖에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타인을 상처 입히며 타인과 쉽게 섞이지 못하는 아이들을 사회는 문제아라고 부릅니다.

이 영화에서 헨리가 임시 교사로 한 달 동안 일하게 되는 곳이 바로 그런 문제아들이 가득한 학교였죠.


주목해야 할 점은 헨리가 임시 교사로 일하는 이유입니다. 헨리 또한 마음에 경계선이 자리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마음에 누군가 개입하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그만큼 타인의 삶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교사로 일하는 이유는, 오직 그 직업이 '임시'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꿔주기만 하면 되는 임시 교사는 학생들과 서로 간에 마음의 경계선을 침범할 일 없는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이죠.


헨리의 이런 자기 방어적인 태도는 다른 문제아 학생들처럼 가정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죽은 헨리의 어머니는 아마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요양원에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얽혀있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할아버지가 계속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후에 헨리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 이유는 근친으로 인한 어머니의 정신적 붕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헨리는 어머니가 비정상적인 사건을 감당하지 못해 무너져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을 것이고요. 그리고 그런 기억들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마음에 견고한 경계선이 생기는 기반이 된 것이죠.


그러나 이런 헨리의 경계선은 상처를 가진 다른 이들에 의해 침범되기 시작합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에리카와 메레디스죠.

헨리는 에리카와 메레디스가 자신이 세워둔 마음의 경계선을 넘어오려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에리카가 단순한 보호의 의미가 아닌 가족의 의미로 다가오려 하자 그녀를 센터로 보내며 다시 거리감을 되찾았고, 메레디스가 제자로서가 아님 사람으로서 호감을 내비치자 당혹스러워하며 밀쳐냅니다. 그 과정에서 동료 교사 매디슨에게 오해를 사게 되자, 매디슨 눈에 할아버지처럼 누군가를 상처 주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한 헨리는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립니다.


헨리는 본인이 상처받았던 만큼 타인이 상처받는 일에도 민감한 사람입니다. 처음 학생들을 마주했을 때도 본인에 대한 모욕은 무덤덤하게 대처했음에도 메레디스를 상처 주는 학생은 가차 없이 내보냈었죠. 그런 그가 할아버지처럼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매디슨에게 통제를 잃은 분노의 변호를 토해내자 메레디스는 당황해 도망칩니다. 자신이 알고 기대고 싶던 헨리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요.


매디슨의 오해로 인해 용기 냈던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린 메레디스는 결국 어느 때보다도 두꺼운 마음의 벽을 세우고, 그 안에 갇혀 헨리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누구도 마음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자신에게 다가와 온기를 나눠줄 수 없다는 절망을 느낀 메레디스는 웃고 있는 많은 사람들 속 영원히 웃지 못하는 한 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메레디스의 죽음은 헨리가 살아오며 두 번째로 겪는 절대적 상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경우와는 달리 헨리는 더 이상 무기력한 어린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자신이 상실이 아닌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죠. 그리고 그 가능성은 헨리가 자신이 쳐 놓은 경계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타인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 온기는 오직 경계선이라는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시에 찔리지 않을 거리감을 유지한 채 전해지는 온기는 결국 타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죠.

교실의 학생들은 부모와 사회로부터 느껴보지 못한 헨리의 온기에 작게나마 변화했습니다. 그러나 텅 빈 교실에 홀로 서있는 헨리의 모습은 결국 가시에 찔리지 않는 거리에서 전하는 온기는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한 명의 개인으로는 그런 아이들을 문제아로 분류하고 솎아낼 뿐인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감싸는 경계선은 고슴도치의 가시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선은 영원히 살에 붙어있는 가시가 아닌, 허물어트릴 수 있는 반영구적인 껍질일지도 모릅니다. 소중한 누군가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고 상처가 아물 수 있는 온기를 전해주기 위해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아야 합니다. 서로의 마음에 둘러진 경계선이라는 가시가 으스러져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있는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상처 입히고 피를 흘리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으스러진 끝에 맞닿은 마음의 온기는 흐르는 피 마저 살아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따뜻함으로 느껴지게 만들 것입니다.


헨리는 에리카를 찾아갑니다. 살아가며 처음으로 마음의 경계선을 무너뜨릴 각오를 합니다. 헨리와 에리카는 때로 서로를 상처 입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끝내 둘은 상처를 딛고 살아갈 수 있는 서로의 희망의 지표가 되어 줄 것입니다.


헨리가 비록 임시 교사임에도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에는 어쩌면 누군가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의 거리감을 유지한 채로 헨리는 사회를, 반의 아이들을, 메레디스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꺼이 가까이 마음의 경계선을 허물 용기를 낸 헨리는 남아있는 소중한 한 명, 에리카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상처가 두려워 세워둔 마음의 경계선이 이끄는 곳은 결국 차가운 외로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경계선이란 가시가 무너질 만큼 세게 서로를 끌어안았으면 좋겠습니다. 기꺼이 상처받고, 그렇게 껍질이 허물어진 서로의 마음에 맞닿은 희망의 지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온기는 사랑에서 기원합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우리를 변화시킨 것처럼, 사람에게 받은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간다는 고난을 해낼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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