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2
일하다 보면 주변에서 "정신없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실제로 일하다 보면 혼이 나갈 때가 있다. 사방에서 갖은 일이 지속적으로 들어올 때, 해야 할 일은 쌓이는데 시간이 부족할 때 우리는 보통 "정신이 없다."는 표현을 쓴다. 일은 고약한 면이 있어서 가끔 조용하다가도 일이 몰릴 때면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폭풍 속 파도처럼 계속해서 나의 시간을 헤엄쳐 들어온다. 이럴 때면 실로 넋을 지키기가 어렵고 그래서 정신이 없다는 표현을 쓰는 건 사실 자연스럽기도 하다.
습관적으로 "정신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실제로 일이 많고 버거울 수도 있겠지만 사회 생활하다 보면 본인이 하는 일을 꼭 주변에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회사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셀프 홍보 방식일지도 모른다. 정신없다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얘기하는 걸 들어본 적 있는가. 아주 재밌다. 나는 이러이러해서 힘들다. 그러냐 와 근데 나는 이것 때문에 정말 미칠 것 같아. 대부분 이런 대화에서 청자는 없고 화자만 있다. 사회생활을 길게 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정신없다."는 말에서는 스스로의 고난을 과대 포장하려는 의도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의도가 서로를 만나면 어느 순간 고난끼리 메아리쳐서 원래도 힘들었는데 더 힘에 부치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어느 이유가 되었든 나는 "정신없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일단 혼이 나간 채로 일하고 싶지 않다. 단위 업무를 할 때 해당 업무의 상위 개념인 사업, 팀의 목적, 조직의 목적, 내가 이곳에서 일하는 목적을 인지한 채로 일하고 싶다. 아주 맑고 또렷한 정신으로 말이다. 가령 오픈 이노베이션 사업의 참가 스타트업 모집 홍보 포스터를 만드는 업무라면, 해당 사업을 통해서 혜택을 볼 수 있는 스타트업이 생각나고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연결하는 우리 팀의 목적이 떠오른다. 조금 더 위로 가면 그로 인해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와 산업이 발전하고 보다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이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최적화에 기여하게 된다. 고작 웹포스터 하나 만드는 걸로 너무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를 하기 자체가 어려운 편이다. 기계적으로 일하고 싶지 않다. 내 영혼의 조각을 조금씩 떼어내서 일에 쓰고 싶다.
힘들다고 나의 어려움을 광고하는 것은 더더욱 싫다. 필요 이상으로 본인이 버겁다는 사실을 감내하라는 뜻이 아니다. 업무로 인해 너무 지칠 때 주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바라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문제를 비대하게 포장하려는 접근 자체가 하책(下策)이라는 뜻이다. 문제로 수렴하기보다는 해결책으로 발산하는 것이 조직에게도 개인에게도 이롭다.
그러니 우리 너무 정신없지 말자. 잘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 없다. 게다가 그 말을 하면 실제로 정신이 없어진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게 설계되어있다. 바쁘다고 이걸 건드렸다가 저걸 건드렸다가 한 시간이 지나면 해놓은 일이 없게 된다. 하나씩 하나씩, 차분하게 본인이 이곳에 있는 목적을 생각하고 그 목적에 따라 업무를 수행해 내면 된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한 가지에 집중했을 때 우리가 못할 일은 거의 없다고 굳게 믿는다.
언제나 본질을 볼 수 있는 지혜에 가까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