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의 오래된 비행이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비행이 있다. 그날의 비행은 지금까지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약해 두었던 비행기 탑승을 두고 3일 동안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던 날이다. 예약한 데로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결정하면 그다음의 모든 일정과 예약은 꼬여버린다. 여행이든 출장이든 잘 풀리려면, 비행기는 스케줄이 절대로 꼬이면 안 되는 일이다.
2001년 9월 15일, 영국 런던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한 날이다. 300명이 넘게 앉을 수 있는 큰 비행기에 승객은 나를 포함해서 단 4명. 눈에 보이는 승무원만 세어보아도 승객보다 많아 보였다. 비행기 객실은 텅텅 빈 상태였다. 4일 전 뉴욕에서 일어난 9.11 테러 때문에 대부분의 승객들이 비행기 여행을 취소한 탓이었다.
비행을 포기한 사람에 내가 포함될 수도 있었다. 9.11 사고를 보고 3일 동안 일정을 변경해야 할지를 고민했었다. 뉴욕 맨해튼에서 벌어진 영화 같은 비행기 테러 장면을 보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비행기를 타도 괜찮을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테러 다음 날, 런던 공항의 모든 비행기는 이륙하지 못했다.
멀리 대서양 바다 건너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 런던을 시작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시작하던 한국인 대학생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종교가 없던 내가 런던의 거리를 걸으며 1파운드짜리 초를 사서 성당에 꽂고 희생자들을 애도했으며, 며칠 뒤에 있을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의 안전을 기도했다. 한 번의 큰 사고는 예외적으로 낮은 확률의 일이고, 그런 큰 사고가 두 번 연속해서 벌어질 확률은 더 낮은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만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약 테러 다음 날처럼 모든 비행기가 런던 공항에서 이륙하지 못하는 상황이 며칠 더 이어지면, 여행 일정을 중단하거나 송두리째 변경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2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순간의 선택과 불운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기업을 퇴사한 뒤 창업을 하고 고생 끝에 사업으로 빛을 보기 시작한 분이 췌장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장례식에 달려가기도 했었고, 접대로 과음한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하고 30대에 생을 마감했다는 선배의 소식도 접했다. 과외와 아르바이트를 해서 비행기표와 여행 경비를 마련하여 배낭여행을 준비하고 여행을 떠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대학생의 머릿속에 그날 처음으로 사람의 일은 내 계획이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른 아침에 런던 공항에 도착했지만 그날의 비행기는 일정대로 운항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과 달리 애플리케이션으로 비행기의 정상 운항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고,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지만, 수없이 많았을 먼저 걸려온 전화 때문에 항공사 직원과 전화 연결은 되지 않았다.
9월 15일 아침, 비행기를 타기로 마음먹고 이륙 여부는 운에 맡기고 일단 공항으로 떠났다. 그날의 승객은 4명뿐이었지만, 탑승구 바로 앞에서 탑승 직전에 가방 속의 모든 파우치와 지퍼를 열고 검색을 당하느라 비행기는 두 시간이나 지연되어 이륙했다. 평소보다 훨씬 복잡하고 꼼꼼한 검색을 당했지만, 나를 검색하는 것만큼 다른 승객들에 대한 검색도 강화되어 있는 상황이라, 불편하고 번거로워도 나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불평하지 않았다. 이후로 수도 없이 많은 비행기를 타며 살게 되었지만, 그날만큼 예민한 상태로 비행기에 탑승한 적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당시, 런던을 시작으로 막 유럽 배낭여행을 시작했었는데 '런던-인, 파리-아웃' 비행 스케줄은 지금처럼 그때도 대학생 유럽 배낭여행 일정에서 국룰이었다. 유레일 패스 사용이 불가능한 영국을 첫 여행지로 두고, 비행기로 바르셀로나로 간 다음, 유레일 패스로 유럽을 여행하고 마지막 일정을 파리로 잡아 두었다.
고민 끝에 탑승한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 그 후로 수백 번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출장을 다녔다. 비행기에서 무서운 느낌을 주는 사람을 보거나 덩치 큰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여 매너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종종 테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닐까 하는 위협을 느낀 적도 있었다. 실제 테러나 위험한 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지만, 비행기에서 만나는 무서운 외모의 승객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가끔은 보이는 비주얼 만으로도 가까이 갈 수 없게 만들거나 나의 곁눈질을 당하는 탑승객도 있었다.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나, 착륙 공항에 부는 바람은 또 다른 차원의 공포였다.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릴 때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옆자리 승객도 있었다. 부산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에서 비행기가 심하게 떨릴 때 승무원이 비상구 좌석에 앉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안심시켜 드린 날도 있었다. 밤 비행 중에 화장실에 들어간 승객이 나오지 않아 승무원들과 승객들이 애를 태우는 경우도 있었다. 출장으로 휴가로 자주 비행기를 타면서 비행기 여행이 가끔은 아찔하고 심장이 쫄깃해지게 하는 순간들이었다. 9.11 직후,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탔던 날부터 20년 동안 비행기에서 다양한 광경들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위험했고, 때로는 아팠지만, 비행기를 타면서 일하고 여행했던 많은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비행기는,
여행을 떠나 직접 경험하고 웃으며 행복해하던 기억을 추억하며 지내는 요즘이다.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상황에는 꼭 출장을 떠나지 않아도 이메일과 영상회의를 통해서 대부분의 업무를 해내고 있다. 비행기가 꼭 필요한 것일까. 비행기를 타고 이동을 하고, 피곤함을 느끼며 굳이 여행을 하고 출장을 가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 의지와는 달리 비행이 금지당하고 있는 지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해외 출장이 줄어서 좋은 점도 여럿 말할 수 있다. 여행 경험을 먼저 다녀온 유튜버의 영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책으로 출간되는 여행 에세이가 대신해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누구나 먼저 비행기를 예약하고 비행기 탑승을 바라며 설레어할 것이다. 팬데믹이 끝나고 탑승할 첫 비행기도 난기류를 만나 흔들릴 것이다. 여전히 가능성이 '제로'가 아닌 비행기 테러의 위협도 비행과 여행을 꿈꾸게 하는 설렘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팬데믹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날, 가보지 못한 나라로의 여행을 꿈꾸고 비행기 예약을 먼저 서두를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 어느 나라로 여행을 생각할 것이고, 한 달 살기 여행에 최적화되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남프랑스 해변의 '니스'라는 도시로 여행을 꿈꿀 것이다. 아무리 멀어도 지구 반대편의 나라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로 다시 한번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팬데믹이 지속되면서 비행기가 그리움의 대상이 된 만큼 마음에 애틋해진 사람들이 있다. 멀리 해외에 보고 싶은 가족이나 친척일 것이다. 팬데믹이 없었더라면 바쁜 서울의 일상에 가려져 멀리 있는 가족이나 친척들을 지금만큼 애틋하게 보고 싶었을까. 팬데믹 상황이 지속되고, 집콕하는 추석과 설을 지내고 보니 그동안 자주 연락하지도 만나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생각난다. 팬데믹이 끝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는 일이다.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날, 어떤 느낌일지 잠시 상상해 보려고 한다.
마스크를 벗고 인파 속으로 들어가 걸을 수만 있어도 행복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요즘이다. 그런 생각에도 눈에 눈물이 고일 것 같은 지금, 비행으로 해외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을 만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 SNS와 메신저 그리고 영상 통화만으로 소식을 주고받고 있는 해외에 있는 친구와의 재회도 눈물 없이 해낼 자신이 없다. 먼 나라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다. 아무리 비행기가 무서워도 흔들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