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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해 Apr 28. 2020

DAY+8 / THE SUNBURNED COUNTRY

 오늘도 일어나니 잭과 리아는 이미 출근 후였다. 해가 일찍 떠서인지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굉장히 빨리 일어나 활동한다. 아침 7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 같다. 나 혼자 게으른 하루의 시작. 양심이 콕콕 찔리지만, 괜찮아. 난 한 달 동안 무조건 게으를 거야! 침대에서 더 비비적거리다가 세탁기를 돌리기로 했다. 삼성 버블. 한국에서도 안 쓰던 세탁기를 여기 와서 쓰다니. 세탁망에 옷을 분리해 드럼통에 넣은 다음 전원을 켰다.

 세탁기의 시간 표시 등이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하기에 커피를 마시러 나가기로 했다. 대충 옷을 꿰어 입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크루아상과 라지 사이즈 플랫화이트를 주문하고 앉았다. 플랫화이트의 로제타는 내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와서 받은 것 중 제일 예뻤다. 커피와 폼도 적당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우유 특유의 진득한 맛도 잘 살아있었다. 아직 원두 자체에서의 매력을 찾지는 못했는데, 현지 우유의 풍성한 지방이 주는 부드러움과 단 맛이 이곳의 플랫화이트가 맛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와서 세탁기를 확인하니 세탁이 끝나 있었다. 건조 버튼을 누르니 무려 3시간이 걸린다고 떴다. 작동 버튼을 누른 후, 오기 전부터 하려고 벼르고 있던 코스탈 워크를 위해 하러 나섰다. 아침엔 분명 흐린 하늘이었는데 소나기가 한 번 쏟아지고 난 뒤 맑은 하늘이 나왔다. 며칠 만에 만난 구름 없는 하늘에 기분이 좋아졌다. 본다이에서 쿠지 해변까지 이어지는 해안가 산책로의 풍경은 정말 그 어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바람이 잔뜩 불어 파도가 장관이었고, 그 파도를 바로 발밑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의 풍파를 그대로 맞으며 버텨낸 해안가 절벽과 바위가 웅장했다. 세차게 밀려오는 파도를 따라 흥이 오른 사람들이 해변에 가득했다. 정말 저 밑 바다에서 솟아오른 것이 분명한 커다란 땅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절로 경외감이 들었다.

 칸딘스키가 붉은 톤으로 죽죽 그어 놓은 것 같은 멋진 바위를 깎아 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또 색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발걸음마다 잽싸게 도망가는 도마뱀과 부시 속에서 애타게 지저귀는 화려한 깃털의 새들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본다이-쿠지 코스탈 워크 로드는 정말 예쁘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요즘 운동이 부족해서 반 조금 더 가니 체력 고갈을 느꼈다. 온 길을 돌아보니 집 근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었다. 체력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쓸 만큼도 안 남은 것 같았다. 이쯤 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다. 이왕 온 거 끝까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구글맵은 20분만 더 가면 쿠지 해변에 닿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고행 길의 시작. 20분이면 도착한다고 했던 목적지에는 두 배의 시간을 들여 겨우 도착했다. 해가 쨍쨍한 정오부터 쉬지 않고 걸었더니, 목이 마르고 다리가 다 후들거리고 기력이 없었다. 정말 이 짧은 시간 동안 온몸의 수분이 바짝 말라 쪼글쪼글해진 기분이 들었다. 사실 출발 전에 확인했던 구글맵의 예상 시간 대로라면 이 해안산책로를 걸어 쿠지 해변에 도착한 뒤 카페에 앉아 해변을 바라보며 목을 축인 다음 돌아갈 예정이었다. 세탁기 건조가 끝나는 시간에 여유 있게 맞을 것 같아 선택한 길이었다. 그런데 막상 걸어와 보니 그 세 배의 시간이 걸렸고 집에 돌아가는데 1시간 30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1시 반이었다. 세탁기의 건조가 끝나는 시간은 2시. 건조 후에 바로 탁탁 털어서 개지 않으면 옷에 주름이 잔뜩 갈 거라는 걱정이 온 머릿속을 채웠다. (큰 문제가 아닌데, 왠지 그럴 수 없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있었다.)그래서 난 반환점을 돌아 다시 걸어야만 했다.


 집에 도착하니 3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건조는 진작에 끝나 세탁기의 열도 식어 있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아몬드 브리즈를 꺼내 한 컵 따라 단숨에 마셨다. 얼른 세탁물을 꺼내 정리했다. 정리를 마치고도 갈증이 없어지지 않았다. 다시 아몬드 브리즈 한 컵을 다 마시고 침대에 뻗어버렸다. 먹은 게 없는데도 입맛도 별로 없었다.

 한참을 누워서 해안가를 찍은 사진을 정리했다. 구글 맵을 다시 열어 오늘 다녀온 길을 다시 한번 검색했다. 다시 보니 내가 처음에 확인한 시간은 '라임'이라는 초록색 표시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라임은 서울의 따릉이 같은 공용 자전거였고, 그 자전거를 이용했을 때의 시간을 첫 번째로 보여준 거였다. (왜 도보를 검색했는데 라임을 보여주는가!) 왜 아까는 이 초록색이 안보였을까. 헛웃음만 지었다.

 여섯 시가 넘어 잭과 리아가 귀가한 후에야 미적대며 일어나 저녁을 먹고 샤워를 했다.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떨어져 닿자마자 팔과 다리가 따가워 화들짝 놀랐다. 옷소매에 닿을까 선크림을 덜 발랐던 팔뚝 부분과 미처 바를 생각을 못했던 허벅지, 종아리가 온통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오, 1도 화상. 오기 전 선물 받은 알로에 로션을 찾아 따가움을 참고 치덕치덕 발랐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오늘 햇빛에 닿은 시간은 3시간. 오늘 오자 마자 마신 시원한 아몬드 브리즈가 아니었다면 난 일사병으로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빌 브라이슨이 호주 여행기를 쓸 적에 책 제목으로 삼을 만큼 강렬히 느꼈던 THE SUNBURNED COUNTRY를 단 3시간에 온 몸으로 익혔다. /27FEB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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