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이렇게 연애했다

사랑이 어려운 딸이 듣는 엄마 아빠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연애 이야기

by 주먹토끼

재연의 아내인 서영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국비장학생으로 선정된 지 얼마 안 되어 재연은 소개팅을 주선받았다. 주선자는 다름 아닌 형수의 언니. 다른 쪽 주선자였던 서영의 고모와는 여고 선후배 사이에 같은 아아 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게 화근이었다. 그들의 작당모의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둘이 낄낄거리며 주선자리를 만들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그렇게 재연은 서영의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걸었다. 6월 3일 롯데월드 분수대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어떻게 재연을 알아볼 수 있냐는 서영의 물음에 '가방끈이 끊어진 네모난 검정 서류가방을 들고 있겠다'라고 대답했다. 서류가방끈이 떨어지는 것도 폼이 안 났는데, 재연은 소개팅날 가방을 가져오는 것도 깜박했다.


이러다가는 상대방이 본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재연은 분수대 주변의 모든 결혼 적령기의 여자들에게 "서영씨?"하고 물어봤단다. 문제의 진짜 ‘서영씨’는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서영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서영이가 소개팅을 하러 온 걸 알게 된 것만 같았다. 주선자였던 고모가 등 떠밀지만 않았어도 서영이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수도 있다. 고모는 고모부 옷을 바꾸러 나왔다고 했지만 틀림없이 서영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려고 말을 지어낸 게 틀림없었다. 하여간 고모는 서영보다도 먼저 롯데월드에 도착해서 “서영아, 너 왜 이렇게 늦었어?”하고 호통을 쳤다. “나 제시간에 왔는데..” 서영은 구시렁거렸다. 구시렁거리는 걸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말 많은 고모는 바로 이어 어떤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인 것 같아. 네 이름을 온 세상 아가씨들에게 묻고 있다?” 서영은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나 원 참, 대체 그 망할 끈 떨어진 가방은 어디다가 두고 자길 애타게 찾는지.


“재연씨세요?” 결국 서영이 재연에게 먼저 물었다. 그렇게 재연과 서영은 만났다. 재연은 서영을 보자마자 ‘웬 고등학생이 나왔네’ 싶었다. 서영은 ‘웬 얼굴 큰 남자가 나왔네’라고 생각했다. 재연은 희겸의 옷이라도 빌린 듯 커다란 와이셔츠에 안 어울리는 양복바지에 구두를 신고 있었고 서영은 그게 퍽 웃기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하던 중 서영은 재연에게 운전면허를 따는 중이라고 했다. 재연은 제안했다. 운전면허시험에 합격하면 축하주를 사주고, 떨어지면 위로주를 사주겠다고. 아무래도 재연식 애프터였다. 서영은 본인은 술을 잘 못 마시니 밥이나 먹자고 했다.


두 번째 만남 때, 재연은 지하철 개찰구 근처에서 파는 장미를 한송이 사서 서영에게 선물해 줬다. 어디서 여자들은 꽃을 좋아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세 번째 만남에는 예술의 전당 뒷동산에서 토끼풀을 꺾어 반지랑 시계를 만들어 프러포즈했다. 그때는 손 잡으면 다 책임져야 하는 건 줄 알았다고. 그렇게 둘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결혼을 준비하게 됐다. 재연은 프랑스에 가서도 서영과 연락했다. 전화도 했지만 대부분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 편지들은 아직도 본가에 구석에 곰팡이가 살짝 핀 채로 놓여있다. 딸은 본인이 태어나기 이전의 재연과 서영의 이런 로맨틱한 순간들이 머릿속으로 잘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멋모르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게 더 속편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딸은 서른이 코앞인데 연애도, 결혼도 너무 어렵기만 하다. 남들은 물 흐르듯이 잘만 하는 것 같아 하루하루 더 조바심이 나고 고민이 깊어져 간다. 에라이, 일단 좋은 사람부터 만나자. 차근차근 해보는거야. 그래도 재연의 이야기는 뭔가 위안이 되는 부분이 있다. 분명 나한테도 이런 출렁거리는 짝을 만날 기회는 있을거야. 아니면 그냥 혼자 살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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