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여자 꺼 아니야?"
대학교 4학년 때 여자친구가 작은 박스를 내게 선물했다. 열어보니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오드뚜왈렛 ‘아쿠아 디 지오 옴므’였다. 뚜껑을 여니 상쾌한 향기가 났다. 아침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 앞에서 이 액체를 팔목과 귀 뒤쪽에 뿌려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내 인생 첫 오드뚜왈렛이었다.
선물을 받기 전까지 내 일상에서 향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꾸미지 않았던 탓에 쉰내가 날 때도 있었을 텐데. 농구, 축구 따위로 땀을 흠뻑 흘린 뒤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를 활보했다. 내 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인지하지 않고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오드뚜왈렛이 내게 왔고, 그날부터 거짓말처럼 평생을 함께하고 있다.
30대 중반까지 늘 ‘아쿠아 디 지오 옴므’만 사용했다. 다른 제품의 향을 맡아보기도 했지만 결국 익숙한 ‘아쿠아 디 지오 옴므’를 선택했다. 휴고보스, 랄프로렌, 캘빈클라인 등에 코를 갖다 대도 왠지 아저씨 향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런던에서 지낼 때 TV에서 ‘아르마니 코드’ 광고를 봤다. 멋있었다. 왠지 향기도 근사할 것 같았다. 동네 ‘부츠(Boots)’에 가서 ‘아르마니 코드’를 샀다.
하루는 길을 걷다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일본인 여학생과 우연히 마주쳤다. 뻔한 대화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그녀가 코를 내 가슴 쪽으로 기울이면서 “어머, 향기 너무 좋아”라고 말했다. 밥도 같이 먹어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그녀의 칭찬에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오늘 내가 저 친구와 로맨틱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날부터 나는 아쿠아를 떠나 코드에 정착했다.
지난해 겨울 아내와 함께 3주 동안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했다. 당시 프랑스는 공공 분야 파업으로 대중교통이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팔레르모에서 파리로 날아가기 이틀 전, 예약했던 항공기가 갑자기 취소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파리 오를리 공항이 파업으로 문을 닫았단다. 로마에서 여권과 지갑을 잃어버린 소동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또다시 생긴 돌발 변수에 짜증이 일었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밀란을 경유해서 샤를드골 공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표를 간신히 구했다.
밀란 면세점에서 아내는 불쑥 “자기도 이제 좋은 향수 써라”라고 말했다.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갑자기 좋은 향수라니? 아르마니 코드가 어때서? 아내는 내 팔목을 잡아 딥티크 매대 앞에 데려다 놓았다. 처음 보는 브랜드 앞에서 어물쩍거리자 아내는 “요즘 다들 이거 쓴단 말이야”라고 핀잔을 줬다.
“이거 여자 꺼 아니야?”
“요즘 그런 거 없어. 직원한테 추천해달라고 해.”
“저, 여기요. 스윗하거나 프레시한 향 좀 보여주세요.”
대여섯 개를 늘어놓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다가 ‘Do Son’이라고 쓰여 있는 제품에 안착했다. 직원은 ‘저 자식, 아까 스윗하거나 프레시한 거 달라더니 왜 도손이야?’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맡아도 여자 향이었지만, 아내의 ‘요즘 다들’ 이론을 반박할 만한 근거가 내게는 없었다. 아쿠아나 코드보다 두 배 이상 비싼 가격에 깜짝 놀라는 동시에 아내의 조말로니보다는 저렴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난데없이 딥티크가 내게 온 날, 우리는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밤늦게 도착한 샤를드골 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들어가는 대중교통도 대부분 운행하지 않았다. 매번 이용했던 북역행 국철은 끊긴 지 오래였다. 최종 행선지인 오페라로 직행하는 ‘르부스 디렉트(Le Bus Direct)’가 있다고 표시되어있었다. 창문 밖으로 탑승장 앞에서 줄을 선 채 기다리는 행렬이 보였다. 뒤에 가서 섰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내를 혼자 두고 공항 청사로 돌아가서 샤킬 오닐인가 싶을 정도로 덩치가 큰 직원을 잡고 물었다.
“지금 저 버스가 오긴 하나요?”
“손님, 어디 가세요?”
“오페라”
“르부스는 이제 없어요. 좀 더 뒤에 보이는 탑승장 보이죠? 저기로 가면 개선문까지 가는 오를리 버스가 있어요.”
“Then, what are they(그 속에서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waiting for?”
“저야 모르죠. No le Bus today, no. 오를리 버스가 2분 뒤에 오네요. Run!”
행렬 속에 있던 아내와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급하게 수습했다. 뒤에 있던 한국인 아줌마가 “왜요?”라고 물었다. 나는 “여기 버스 없대요. 저거 타면 개선문까지 갈 수 있대요”라고 말했다. 다급한 한국어를 엿들은 다른 한국인 그룹이 “뭐라고요? 확실해요?”라고 되물었다.
“지금 저 직원한테 들은 내용이에요. 솔직히 그게 맞는 정보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저희는 믿어보려고요.”
그리고 뛰었다. 한 가족이 우리를 뒤따라왔다. 다른 그룹은 그곳에 남기로 한 것 같았다. 빨간색 오를리 버스는 우리를 개선문까지 안전하게 배달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익숙한 풍경에 안도의 한숨이 샜다. 어쨌든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는 성취감, 내일부터 ‘좋은 향수’를 뿌릴 수 있다는 기대감이 동시에 몰아쳤다. 자, 이제 우버를 부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