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서 만나자
1화 보고 오기
공부가 안된다.
오늘 스터디 모임에서 본 모의고사도 망쳤다. 시험 전 마지막이었는데… 말 그대로 ‘머리가 새하얘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몸소 체험하고 왔다. 문득 공인노무사 시험에 대해 처음 알아봤을 때가 떠올랐다. 객관식이 아닌 서술형이고, 엄청난 암기력을 요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문득 걱정되는 게 바로 이거였다. ‘갑자기 기억나지 않는 것.’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면 당연히 물이 새겠지만, 새는 속도보다 더 빨리 부으면 채울 수 있다고 믿고 달려왔는데… 더 속상한 건, 너무 많이 회독해서 지겨울 정도였던 쟁점이 문제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보처럼 손만 부들부들 떨다 돌아왔다는 것.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가장 경멸하던 수험생 유형이 바로 지금의 나인 것 같다. 멘탈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 말이다.
아, 취소다. 내가 ‘가장’ 경멸하는 수험생 유형은 따로 있다.
장수생, 그게 바로 나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교복 입은 6년 내내 똑똑하다 소리만 들어온 내가. 대학문 열고 들어가 4년 내내 장학금 받고 학교 다니던 내가. 휴학 한번 없이 졸업과 동시에 7급 공무원에 붙었던 내가. 5년 장수생이라니.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 눈을 감았다 떴더니 5년이 흘러 있었다. 분명 그 시간 속에 내가 있었고, 계속 무언가를 해왔던 거 같은데, 그 시간이 내 인생에서 무자비하게 삭제된 느낌이다. 마치 배고픈 노숙자가 생크림 케이크를 허겁지겁 아무렇게나 퍼먹은 것처럼. 꼭 몽유병 환자가 되어 나도 모르게 시간이 든 물컵을 쏟아버린 것처럼. 그렇게 나도 모르게 장수생이 되어있었다.
이 엿 같은 사실에 직면하면 무너질 것 같았다. 벼랑 아래로 속절없이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시험에 집중했다. 붙으면 돼. 붙으면 다 해결돼,라는 순진한 주문을 외우면서.
그래, 순진한 주문. 그런 건 때때로 도움이 된다. 다정 언니가 내게 주었던 말들 역시 그랬다. 이번엔 분명 합격이라고 믿었던 세 번째 시험에서 떨어진 날에도, 수직적인 공무원 생활이 버거워 제 발로 뛰쳐나왔던 날에도, 언니는 내게 잘했다고만 해주었다. 무조건 내 편이라고 해주었다.
지금까지 난 언니가 현실감각 없는 망상가라고 생각했다. 아니었구나. 언니도 현실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응원해 준 거였구나. 나는 그 덕에 현실을 버텨왔으면서 그 따위 낙관은 무용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있었구나.
나 사실
언니의 대책 없는 따뜻함에
기대고 있었구나.
계속.
안녕하세요, 유이음입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마지막화인 24화까지 매일매일 연재될 예정입니다. 11화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라이킷과 댓글, 작가 소개 옆 구독 및 알림 버튼>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