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이 많고 이곳저곳 시끄러운 중동에서 가장 분쟁을 많이 겪은 골란고원. 이곳은 봄을 닮았다.
추위도 가시기 전에 봉오리가 터져버린 산수유가 제일 먼저 꽃소식을 알려온다. 뒤이어 매화, 개나리, 목련까지 흐드러진다. 벚꽃까지 몽글몽글 맺히면 겨우내 기다리던 봄이 온 것이다.
이른 봄, 가장 먼저 입장하는 꽃들은 대게 노란색, 혹은 하얀색이다. 분홍 미소를 띤 진달래도 보이지만 더 진한 색은 찾기가 힘들다. 붉은빛, 보랏빛은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 퍼레이드는 이제 막 시작이다.
자연이 참 신비하다 싶다가, 그냥 기분 탓인가 싶다. 봄이 원체 사람을 들뜨게 하니 온갖 것들에서 다 의미가 피어난다. 정말 꽃이 피는 순서 속에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이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빠는 꽃의 강렬한 색소가 강한 햇빛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냥 가설이다. 과학적 근거 같은 건 없단다. 그러나 목련 중에서도 백목련이 자목련보다 일찍 피는 것을 보면, 설득력이 더해진다. 날이 점점 따스해 지다가 옷이 홑겹이 될 때쯤, 이것 보시라. 가장 늦게 피는 철쭉이 가장 진하지 않은가.
봄이 정처를 둔 곳 중 으뜸인 곳을 안다. 골란고원이다. 이름만 들으면 어디 높은 곳에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주변 지역보다 높지 않은, 똑같은 평지다. 갈릴리에서 올려다봤을 때 높기 때문에 고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가 해수면으로부터 약 209m 가량 아래의, 푹 꺼진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행자가 텔아이브나 예루살렘에서 골란고원을 갈 적엔 올라가지 않는다.
그냥 평지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고원에 진입한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골란고원인 줄 알아야 하느냐’ 묻는다면, ‘창밖의 꽃을 보시라’, 말씀 드릴테다.
텔아비브의 집 앞에 피던 검붉은 꽃이 있었다. 생김새는 언뜻 무궁화 같았는데 크기가 얼굴만 해서 그 옆을 지나갈 때면 거대 수술과 눈이 마주치는 희한한 경험을 선사하던 꽃이었다 (‘불쾌한 골짜기’ 이론의 현현이 될 뻔했지만, 아무래도 꽃은 어떻든 예쁘다). 꽃잎이 도톰하고 야무져서 손톱으로 살짝 누르면 ‘서걱’하고 들어갔다. 손톱 끝엔 끈적한 즙이 묻어났다. 이스라엘의 열대성 기후에 피는 꽃들은 크고 화려하다. 큼직큼직한 덩치만큼이나 색깔도 뚜렷하다. 백합, 국화, (붓꽃이라고도 불리는) 아이리스 같은 꽃들이 쨍쨍한 햇살 아래 당당한 자태를 뽐낸다.
그에 비해 골란고원의 꽃들은 자그맣고, 소박한 느낌이다. 봄꽃처럼 하얗고, 노랗고, 작다. 그렇게 안개처럼 온천지에 흩뿌려져 있다. 창밖의 꽃이 오밀조밀해지면, 도로 양가의 풀밭이 살랑살랑 나부끼면, 골란고원인 것이다.
이곳이 봄을 닮은 이유는 아마도 기후의 영향인 것 같다. 갓길에 차를 잠시 세우고 그 땅을 밟으면, 그 내음을 맡으면,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골란고원이 덥지 않다는 것이다. 골란고원은 위도가 예루살렘보다 북쪽으로 위치해서 있어서 날씨가 온화하다. 꽃도, 바람도, 햇살도, 무엇이든 연하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물이 부족한 나라, 때에 따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이스라엘에서 예외적으로 이곳만은 지하수가 풍부하다. 맑고 깨끗하고, 맛도 좋다. 땅도 비옥하다. 각종 밀과 곡물, 과일, 포도 등이 생산이 많이 된다. 골란고원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야르덴(Yarden)'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와이너리 외에 치즈 공장도 유명하다. 목축도 많으며, 고기 맛도 훌륭하다. 골란고원의 봄은 예쁘기도 하고, 맛있기도 하다.
정말 탐스러운 땅이 아닐 수 없다. 아빠는 이곳을 너무 좋아하셨다. 여행 중 묵었던 민박집에서 아빠는 샤워를 하고 나와선 물이 너무 좋다고 별안간에 5세 딸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텔아이브에서 씻을 적엔 늘 물에서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났었는데, 정말 골란고원의 수질은 달랐던 거 같다.
아침에 민박집 주인이 바구니에 빵과 버터를 가져다주었다. 아빠는 빵 하나를 갈라 그 속에 코를 박고 숨을 쉬어댔다. 구름을 닮은 단면이 보였다. 할라빵은 묵직하기도 폭신하기도 했다. 납작한 피타빵을 뜯어먹던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푸짐함이었다. 골란고원의 허리까지 자라는 풀밭을 헤치며 뛰어놀았다. 그러다가 푸른 풀과 작은 꽃들을 누비질한 대지를 이불 삼아 뒹굴었다.
아무래도 골란고원은 너무 좋다는 점만 제외하면 너무 좋다(?).
그러니까, 여긴 풍요의 땅이라서 탈이다. 날씨, 토지, 물, 이 삼박자가 아주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을 만들었다. 이웃나라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서로 이 영토를 주장하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래서 안전 측면에서는 여전히 위험한 지역이다. 골란고원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유엔에서 평화유지군을 파견한 적도 있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여행금지구역이다. 가장 풍요로운 곳은 늘 가장 위험하다. 모두가 탐을 내니까 그렇다.
나이지리아는 석유와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여러 부족 간의 내전이 생기면서 나라가 엉망이 되었다. 베네수엘라에도 석유와 관련된 이권, 사업권, 경영권을 둘러싼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미국이 가끔 휘청거리는 이유는, 바로 그 풍요로움의 진원지인 월가 때문이다.
반면 어디서든 석유를 둘러싼 대립이 시끄러운 중동에서 가장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는 둘 중 하나이다. 다행히도(?) 석유가 없거나, 강력한 전제정치를 하거나. 요르단이나 튀니지가 전자에 해당할 것이고 오만, 카타르, 사우디 아라비아 같은 왕국들이 후자의 예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골란고원을 빼앗기기 어려운 측면이 더 있다.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한 헬몬산은 시리아와 골란고원을 나누는 국경지역이다. 골란고원은 이스라엘 최대의 물 공급처인 갈릴리 호수를 지키는 최종 방어선인 거다. 그러니 골란고원은 사활적인 이슈가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점령에도 이따금씩 시리아군이 침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비교적 평온한 시기에도 곳곳엔 무장한 병사들과 장갑차들이 다녔다. 풍요롭다는 건 실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오랜 아픔을 지녔는데, 이토록 온화할 수 있을까. 분쟁의 땅에 봄이 한껏 와 있다. 빗발치는 포탄 가운에 꽃이 핀다. 태양의 뜨거운 지지도 없이, 어떤 화려한 맵시도 없이. 처음엔 연하게 핀다. 그러나 겨울의 혼란이 가시기도 전에 와버린 여린 꽃잎에 추위가 이내 물러간다.
미풍이 분다. 따스한 손길로 곳곳의 한기를 녹인다. 혹한을 뚫고, 눈 폭풍 사이로 오느라 거칠어졌을 법도 한데, 어찌 이리 보드라울까. 그런데 봄은 늘 그렇다. 전쟁 속에도 아름답다. 반갑다고 인사하면 눈 깜짝할 새 가버리는 봄, 그래도 봄은 늘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다. 전쟁 중에도 다시 온다.
다가올 더위를 미리 식혀 놓으려는 듯, 봄바람이 살랑살랑 그늘 아래를 스친다. 조금이라도 더 머물어라, 봄아. 태양아, 탐심(貪心)아, 너무 빨리 열을 올리진 말라고, 구름아, 우정(友情)아, 더 두텁게 하늘을 덮어 달라고, 이 보드라움이 딱 좋으니, 여름은 최대한 더디 와달라고 골란고원에게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