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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니 Feb 22. 2020

갑작스러운 생이별 부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급작스런 취업

2020년 1월 중순

설날(춘절)을 앞두고 마스크 낀 사람이 많아졌다. 작년에도 미세먼지가 담배연기 같던 때에도 아이, 어른 모두 안 끼던 마스크를 집 앞 마트에도 끼고 나왔다. 사스로 인해 인식이 심어져서 그런지 우한에서 생긴 호흡기 질환이 마스크를 끼게 한 것 같았다. 심각하긴 한가보다, 그래도 여긴 전염병이 창궐하면 의료시스템이 뒷받침해주질 않으니까 다들 예방하는 마음에서 낀 거겠지, 엄청 심각해지진 않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즈음 내 생일이 2월이라 선물로 뭘 갖고 싶냐는 남편의 말에 하얼빈에 놀러 가서 빙등제 보고 싶다고 했다. 겨울축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유명한 축제가 있으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얼마 전 TV에 나온 백종원 아저씨의 우한 먹거리 탐방이 유혹적이었는지 우한은 어떠냐고 물었고 그럼 둘 중 한 곳 가자고 했고, 놀러 가려고 비행기 시간이랑 가격을 알아봤다. 생일이 1월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남편이 강력하게 우한을 가자고 추진해서 비행기 값도 더 싸고, 비행편도 많아서 우한으로 가려고 결정을 했으니까.


설날 명절 연휴 이틀 전에 비행기를 탔다. 나중에 보니 우리 전날 탄 사람들이 확진자였다. 하루만 일찍 왔어도 2주간 격리될 뻔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뉴스는 연일 난리가 났다. 중국 웨이보에 뜬 기사도 심상치가 않았다. 일반인들이 체감하기로 하루 이틀 사이에 역병이 창궐한 셈이다. 그전부터 징조가 보였지만 눈에 도드라지지 않으니 무시했던 게 말이다. 남편은 회사에서 별다른 말이 없어서 예정대로 출국해서 출근했다. 나는 상황 보고 나아지면 출국하기로 했다.

* 대부분 일하는 남자들은 출근을 지켜야 하니 출국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개학일이 오기 전까지 한국에 남아있는 걸로 결정했다.


그렇게 우리는
강제 별거 부부가 되었고,
오늘은 그 날로부터
딱 한 달이 되는 날이다.

해외파견 취업

1년간 집에만 있으면서 어학 공부하고 대학원을 알아보다가 디스턴스 러닝(원격 수업)으로 외국대학원 학위에 도전하려고 했다. 이미 대학원을 시작한 친한 언니가 집에 있으면서 원격으로 한다면 나중에 불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충고에 어차피 원격이라면 현장에 있으면서 하는 게 좋긴 하겠다, 생각했다.


그럼 남편의 직장은 어떻게 될까. 이미 작년 말에 우린 2020년 혹은 2021년 초까지만 다니다가 2021년에는 한국에 가자, 결정했다. 그간 남편은 직장생활의 감옥 같고 애매한 위치에서 많이 힘들어했고, 변할 거 같지 않은 체계에 고민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뿐인 가족은 일과 공부를 빨리 시작하고 싶어 했다. 공부는 어찌할 수 있다 치더라도 일은 중국에서 잡기 쉽지 않았으니까(단순 노동 알바는 할 수 있지만 나 같은 한국인-중국어도 잘 못 하는-은 절대 써주지 않는다) 한국에 가거나 한국 회사로 취직해서 제3 국으로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중국에서 오래 살지 않을 거란 생각에 다시 취업공고 사이트와 해외취업 관련 공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영어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집중이 안될 때마다 맘에 드는 공고가 뜨는지 확인했다. 확실히 연초가 되니 많은 단체에서 해외 파견 인력 공고를 많이 내보냈다.


그중 개발도상국에서 하는 보건사업 관련이고 보건학 석사 경력(연구 경력으로 대체)이 필요한 업무가 있어 이력서를 보냈다. 문제는 고민하면 안 할 것 같아 보내 놓고 보자는 마음으로 급히 써서 보냈더니 '사진'란을 누락시켜서 보낸 것이다. 다음 날 알게 되었고 이제 와서 수정 이력서를 보내는 것도 아닌 것 같아 그냥 끝난 거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서 면접을 볼 수 있겠냐는 메일이 왔고, 당장은 어려우니 유선 면접 가능 여부를 물어보니 된다고 해서 대표님과 먼저 카카오톡으로 면접을 하고, 명절 연휴 전날에 사무실에 방문해서 면대면 면접을 하기로 결정했다.


면접은 간단했다. 그냥 어떤 마음으로 지원했고, 만약 간다면 언제 가능한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봤다. 신기했던 건, 남편이 그만두고 따라올 거라는 얘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임신과 출산, 남편의 벌이 같은 외람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느낌이 싸했다.

만약 된다면 2월 전후로 출국할 수도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너무 큰 일을 벌였다. 남편 하곤 면접 얘기 나올 때부터 상의했다. 언제나 그러하듯, "합격하면 생각해. 아직 될지 안 될지 모르니까 너무 앞서 생각하지 말고." 했지만 설레발이 심한 나는 짐 싸는 것부터 남편의 사직일까지 생각 중이었다.


한국에 와서 하루 쉬다가 시댁 내려가는 길에 구로에 있는 사무실로 가서 면접을 봤다. 아무래도 정말 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내가 가게 될 곳의 정보와 월급 내역, 기타 세세한 상황들을 설명해 주셨다. 연락은 설날이 끝나면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시댁에 갔다. 식구들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알리자 예전에 방글라데시로 간 지인이 있다며 시엄마는 두 팔 벌려 나의 합격을 응원해 주셨다.



남편의 출국일.

남편을 공항에 데려다주러 나갔고 도착해서도 그는 위험하니 차에서 한 발짝도 내리지 말라는 엄포를 놓아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나는 차에서 배웅했다.


집에 돌아오니 합격 메일이 왔다. 남편에게 말하니 상세한 질문을 추가로 더 물어보고(임신에 대한 회사 규정 등) 생각해보라고 했다. 급여나 복지는 생각보단 적었지만 업무 내용이나 회사 분위기는 생각만큼 괜찮았다. 우리가 한 푼도 없는 사회초년생이었으면 고민됐을 것 같지만 돈이 모자란다고 해도(모자랄 일은 없을 것 같다) 몇 달은 버틸 잉여재산을 축적한 탓에 머리 맞대고(원격으로) 상의하고 토론한 결과, 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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