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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rora May 16. 2018

그 남자의 잠버릇

#오로라 감성에세이 『02_ 지나간 과거의 나와 헤어지기』  

Ⓒphoto by wonstar




   그 남자는 팔을 쭉 뻗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어쩌다 몸을 옆으로 뉘여도 만세 자세를 유지했다. 독립투사인가. 해방의 날은 멀었나. 새벽 일찍 출근해서 밤 늦도록 시도 때도 없이 야근을 하던 남자는 집에서는 말도 하기 싫은지 입을 꾹 다물고 텔레비전만 봤다. 시간을 맞춰 집에 놀러 가지 않는 한 얼굴을 보기도 힘들어졌다. 가끔 밑반찬을 챙겨 남자 집에 가면 그는 녹초가 되어 침대에 뻗어 있기 일쑤였고 어떤 날은 만세 자세로 잠든 모습만 보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벌을 서는 아이와 같이 그 남자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애를 썼다. 나와 전화하는 시간보다 담배 피우는 시간이 더 간절한 그 남자에게, 나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기보다 어떻게든 잠자는 시간을 늘리려는 그 남자에게, 내가 거기 있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그 남자에게,



     벚꽃 보러 가기로 했잖아.

    여기 있어?



   도 못 할 약속을 지키기 바 건 지나욕심이었을 것 이다.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연인과 함께 벚꽃 보러 가는 일을 올해는 기어코 들어주겠다던 남자는 세 시간 이나 여의도에 나를 내버려둔 채 집에서 만세를 외치며 자고 있었다. 남자를 깨우려다가 관두고 소파에 앉아우리에게 몇 번의 벚꽃이 남았을지 생각해보았다. 벚꽃이 피는 걸 생각하는 동안 내 인생이 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먹지 않아 상해버린 반찬들을 꺼내 버리고 냉장고를 닦고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돌린 다음 남자의 와이셔츠를 손으로 깨끗이 빨아 건조대에 널었다.어떻게든 남자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써 봐도 남자는 꼼짝 않고 잠에 빠져 있었다. 물걸레를 손에 쥔 채 테라스에 쪼그려 앉아 울었다. 고작 손에 쥐고 있는 게 물걸레라는 사실이 나를 참 초라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웅크리고 자면 불쌍하게라도 생각했을 거 아냐. 얼마나 갑갑하면 자면서도 만세야. 당신의 잠버릇은 나를 못 견디게 해. 코를 심하게 골거나 이를 가는 것도 아니고 변태이거나 몽유병 환자도 아니지만,



Ⓒphoto by wonstar



     새 같다고? 그럼 넌 뭔데?

 

    새장.

 



  늦은 밤 전화를 받아준 친구는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은 곳까지 스며들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건 괴로웠다. 나는 다리를 그러모으고 앉아서 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이라도 흘러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점점 더 또렷해지는  마주했다. 당신만 곁에 있으면 무엇이든 견뎌낼 수 있다는 의지가 거짓말처무의미해지는 것을 타인이 되어 지켜보았다. 몇 년간 무수한 고비를 넘기면서 지켜온 사랑이었는데 겨우 잠버릇 때문에 이별을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너 곧 서른이야. 결혼 안 할 거야?
  다들 그렇게 살아. 참거나 잊는 거야.



  전화를 끊고서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오늘이 내일의 전부이거나 서른 이후의 삶이 서른 이전의 삶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함이었다. 쳇바퀴에 갇힌 햄스터는 미치지 않으려고 달리고 달리다가 어느 순간 쳇바퀴가 된다. 그런 삶을 지속한다는 게 몸서리쳐졌다. 달리 어떻게 모양을 바꿔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찍혀 나오는 현실을 마주하며 살 자신이 없었다.



          외롭다는 말조차 너무 외로운,
          그립다는 말조차 너무 그리운,
          사랑한다는 말을 사랑하지 못하며
          살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 남자의 자는 모습을 바라봤다. 당신 참 수고가 많다. 그 따듯한 한마디를 더는 내가 해주지 못해도 당신은 괜찮을까. 당신도 이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양복 안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니면서도 꺼내볼 생각조차 못 하는 당신을 탓하려는 게 아냐. 어쨌든 당신은 살고 싶은 거잖아. 나는 우리가 무엇을 살고 있는 건지 잊어버린 오늘이 두려워졌어. 한때 우리는 서로의 버킷리스트를 밤새도록 떠들며 마치 그 날이 이뤄진 듯 충만했었지. 지금 우리를 봐. 눈을 뜨면 오래전 꿈이 생각날까 무서워서 바닥이 없는 잠속에 빠져 있는 우리를. 365일 같은 노선 안에서 움직이며 어느 날 우리 인생에 남은 벚꽃이 더는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아프지 않을 자신이 있어? 비겁하지 않을 용기가 있어? 서로의 꿈을 기억하고 있던 그 시절 미래는 우리의 웃음 속에 있었고,



   우리는 참 따뜻했었지.



  당신의 눈을 바라보던 날들. 당신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던 순간들. 내 손을 처음 잡아준 비 내리는 정류장을 기억해. 나는 단발머리를 좋아하는 당신을 위해서 긴 머리를 잘랐어. 고기라면 환장을 하는 당신 때문에 식성도 바꿨고, 원피스를 좋아하는 당신 앞에서 바지를 입으면 죄짓는 기분이 들곤 했지. 운동화 대신 하이힐을, 발라드 대신 클래식을,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되고 싶었어. 그러는 동안 나는 내 버킷리스트를 잊어버린 거야. 내게 어떤 꿈이 있었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억조차 나지 않더라. 이것 봐, 우리는 오늘 벚꽃을 보러 가기로 했잖아. 우리가 함께 보지 못했던 벚꽃을.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 나는 벚꽃을 말하는 게 아니야.



   잊어버린 우리,


    


    


    나.


 

  그 남자의 쭉 뻗은 팔을 이불 속에 넣어주고 마지막 시간을 다하는 마음으로 그를 껴안아주었다. 그의 숨소리가 아프게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이별 후에 올 여진을 감내하려고 노력했다. 이별을 연습하는 게 부질없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든 나를 이해시킬 이유를 찾고 싶었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고기를 재어 굽고, 콩나물국을 끓이고, 계란찜을 하고 나물을 무치고, 처음 그 남자에게 차려줬던 저녁 식탁을 떠올리며 빨간 테이블보를 깐 다음 촛불을 켰다. 아마도 밥과 국이 다 식은 후에야 당신은 홀로 이 식탁에 앉아서, 내가 왔다가 갔구나 할 것이다. 당신 자리에 미리 앉아서 맞은편에 앉아 있을 나를 떠올렸다. 당신 앞으로 음식을 밀어주며 조금이라도 더 먹게 하려고 안절부절못하는 나의 모습을 봤다. 상한 반찬보다 보잘것없이 치부해버린 나의 모든 감정을 주워 먹으며…….


 

Ⓒphoto by wonstar




   날개를 잊은 새에게 하늘은 자유가 아니야. 새장이지. 사랑이 그렇게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나는 당신이라는 작은 새장이 사랑이라고 믿으며 거기 들어가려고 내 날개를 꺾었어. 열린 새장 밖으로 날아갈 생각도 못한 채 머리 위에 하늘마저 잊었지.



알아,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
결국 나는 나라는 새장에 갇힌 거니까.



  나를 혼자 내버려둔 건 당신이 아니라 나였으니, 나는 이제 지나간 나와 헤어지려고 해. 나는 산소통도 없이 당신이라는 달로 뛰어든  멍청한 우주인이지. 언젠가 내 슬픔을 이해하게 된다면,  


  

   당신은 이제 중력을 배운 거야.



   그 남자와 헤어지고 세 번의 계절이 지난 뒤에야 벚꽃을 보러 갔다. 이십 대에서 삼십 대로 넘어간 후 세상의 체감온도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워졌지만 나는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하나쯤 이룰 수 있다는 사실에 괜찮아졌다. 발걸음마다 향기가 따라오는 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다. 당신에게 이런 사람이고 싶었다. 끝없는 기쁨과 격려. 한결같은 믿음과 헌신을 보내주는 사람. 생각하면 웃음이 피어나는 사람. 당신의 고통을 대신 짊어져서라도 당신만은 덜 아팠으면 했다.




Ⓒphoto by wonstar



  지금 내가 후회하는 건 당신을 사랑했다는 게 아니다. 왜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사랑하지 못했느냐지. 당신의 발걸음만 보고 따라가느라 벚꽃이 핀 것도 모르고 살았다. 그땐 나도 한 번쯤 소리 내어 자신에게 참 예쁘다 말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게 후회가 된다. 당신을 기억하는 동안 나를 잊고 살았다는 거. 나에게 한 번도 욕심부리지 못했다는 거.


 

 그땐 너도 몰랐잖니.




  벚꽃이 내게 건네는 위로를 듣는다. 사랑이란 게 그렇지. 꽃핀 줄 모르게 피고 꽃 진 줄 모르게 지는 거지. 따지면 무엇하겠어. 손해 보는 싸움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사랑에서 무엇을 더 바라니. 수많은 외로움 속에서 벚꽃이 되어준 사람들. 지금 네 머리에 떨어지는 저 벚꽃들은 그들이 네게 보내주는 고마움과 미안함 또 다른 격려일 수도 있잖아. 그러니 이제는 지나간 시절에 안녕하니 안부를 묻고 너도 그만 이별을 지나가.


  손을 뻗어서 떨어지는 벚꽃을 잡으려는 순간, 그 남자의 잠버릇이 생각났다. 당신은 요즘도 그러는지. 손을 뻗고 자는지. 자는 동안에도 피곤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은 무엇을 잡으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무엇을 놓으려고 했던 걸까. 나처럼 가끔 우리를 생각하며 긴 밤을 뒤척이거나 울거나 웃거나 하는지.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겨울을 걷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당신을 기억한다. 음악이 꽃으로 피는 봄을 본다. 봄이 음악으로 태어나는 순간을 본다. 우리 삶에 남은 벚꽃을 본다. 언젠가 당신이 우리의 추억을 부를 때 그곳에 벚꽃이 피어있기를. 괜찮다면 당신,



  창문을 열어




Ⓒphoto by won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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