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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린와이 Aug 07. 2021

여행지 로맨스 - 그해, 터키에서 생긴 일 3 & 4

#3 동행,  #4 "J"




그해, 터키에서 생긴 일


#3 동행





요즘은 다들 쉽게 사랑하고 끝내잖아. 옷 바꿔 입듯.
난 아무도 쉽게 잊은 적이 없어. 누구나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거든
 - 비포 선셑, 2004  








파묵칼레는 작지만 흥미로운 곳이었다.

조용하고, 새로웠다.


J와 나는 들뜬 기분으로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고, 온천이 흐르는 석회암 질의 미끌미끌한 언덕을 맨발로 걸어 다니는 일은 조심하라며 손을 잡아주기에 더없이 좋은 핑계가 되었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종종 산악 동호회 가입을 권유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낮시간 내내 긴 대화는 없었지만 자주 웃으며

각자의 여행을 함께 즐겼다.










파묵칼레는 터키의 3대 명소 중 하나로 석회층으로 이루어진 온천지대와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어우러져 있는 도시이다. 석회층 온천지대는 세계 자연유산으로, 로마 유적지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어

야외 온천 수영장 바닥에 로마 신전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는 등 두 가지 세계유산이 서로 콜라보를 이루고 있다.    







 



점심을 먹으러 찾아 간 식당엔 우리뿐이었다.

여행객들이 간단히 방명록을 쓸 수 있게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이마를 맞댄 채로 이곳을 들러간 여행객들의 흔적을 하나하나 읽어 갔고,

웃고 떠들다 우리 역시 둘의 이름으로 글을 남기고 떠났다.  






당일로 머문 일정의 다음 목적지는 셀축이었다.

파묵칼레에서 셀축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걸렸고,

당일 숙소를 구해야 했기에 서둘러 터미널에 도착해 가장 빠른 버스에 올랐다.







이번엔 나란히 앉았다.

1박 2일간 씻지 못해 떡진 머리와 기름진 얼굴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서로를 놀리며 장난을 쳤다. 

하나의 이어폰으로 음악을 나누어 듣기도 하고

간단한 신상도 물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셀축에 도착하면 숙소는 어디로 할지,

늦은 저녁 메뉴는 무엇으로 할지,

옆자리에 바짝 붙어 서로 준비해 온 자료를 함께 보며 계획을 세웠다.


3시간은 30분보다 빠르게 지났다.








대화 중에 느낀 J는 문득문득 어딘가 슬퍼 보였다.


불필요한 말은 최대한 아끼는 느낌이었고,

대화가 끊겼을 때는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가설을 세웠다.


1. 내가 맘에 안 든다

2. 굉장히 소심하고 수줍은 성격이다.

3. 이별을 한 후에 여행을 왔다.


1번이라 하더라도 내 행동이 변화될 건 없었다.

난 그냥 가장 '나답게' 행동하면 되는 일이다.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선 그 마저도 힘든 일이니까..


늘 생각했다.

'가장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가장 매력 없는 사람이 된다고.'


나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3번이라 나만의 결론을 내렸고,

J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친 감정을 다독여 주다 보면 호감을 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늦은 저녁 시간 셀축에 도착 후 더 둘러보지 않고 후보 1번 숙소에 방을 잡았다.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하며

'아니 굳이 방을 두 개나 잡아야 될까요?

내가 바닥에서 잘게요!'


라는 멘트가 어금니까지 올라왔지만,

지성인답게 꽉 물어버렸다.


.

.



각자의 방에 짐만 가볍게 풀고 나와 근처의 피데 집을 찾았다.

새로운 도시에 왔다는 설렘과 피곤한 일정을 끝냈다는 개운함에, 우리는 약간의 알콜과 함께 꽤나 유쾌하고 말랑말랑하게 섞여갔다.    







10월의 셀축은 야외 산책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작은 동네의 중심 거리를 벗어나자 자그마한 사원 앞에 오래된 벤치가 보였다.

벤치 주위에만 푸른 조명이 있어 주변의 잔디와 나무들이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J는 벤치에 나는 잔디에 마주 보고 앉았고,

각자의 손엔 거리의 상점에서 들고 온 하프 바틀 와인이 한 병씩 들려 있었다.


최선을 다해 J를 웃게 만들었다.


깔깔 웃고 있는 동양인 둘을 향해

지나가던 현지인들이 간간히 말을 걸어오는 일은

먼 타국에서의 흥겹고 이국적인 밤에 양념을 더했다.


J가 즐거워하는 게 느껴졌고,

조금씩 감정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이제 막 문을 닫으려는 작은 상점에서 맥주를 한 캔씩 더 샀다.

밤은 이미 깊어져 거리엔 인적도 거의 없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묘한 설레임의 어둠이 숨 죽이고 있었고,

이미 깊은 밤이 내려앉은 텅빈 거리는 우리 둘의 낮은 목소리로 가득 찼다.


긴 일직선의 도로를 나란히 걸으며

나지막하게 J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요? 혼자 많은 여행을 해봤지만 지금이 가장 즐거워요.

고마워요. 혼자였으면 이러지 못했을 거에요.'


J가 웃으며 받아쳤다.

'맞아,

게다가 나 같은 미인이랑!? ㅎㅎ'


짧은 미소 뒤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이왕 베푸는 거,

나 평생 잊지 못하게 해 줄래요?’



그리곤 가만히 J의 손을 잡았다.














그해, 터키에서 생긴 일


#4  "J"






내 눈썹도, 내 손끝도, 내 발가락도..
너를 따라 움직여



(마지막 이야기)






우리는 한참을 내방 창가에 나란히 기대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이렇다 할 풍경이 없었지만 그 좁은 창가에 둘이 딱 붙어 서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저 멀리 에게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쌀쌀한 밤공기에 손과 볼이 차가워질 만 한데,

홀짝홀짝 마시다 빈 깡통이 된 에페스 맥주 덕인지 우리의 두 볼은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

.


나는 주로 J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상대로 J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이별의 아픔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벗어나려 여러 가지를 시도해봤지만 오히려 점점 더 빈자리만 크게 느껴질 뿐이었다.


결국 온전한 ‘자신’을 찾기 위해 무작정 혼자 여행을 떠났지만,

외로울수록 그 사람이 더 생각나서 괴로웠다.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쪽은 J였다.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관계에 대한 아쉬움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 내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었다.


이성은 감정을 가까스로 설득했지만,

치유는 오롯이 감정이 감당해야 할 숙제이며,

힘들게 시간을 흘려보내며 하루하루 눈을 떴을 때

조금 더 나아져 있기를 바라며 기다릴 뿐이었다.


.

.


보통의 연애에서,

여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건 꼭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다해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못되고 바뀌지 않는 행동들을 고치겠다고,

미안하고 사랑하니 돌아와 달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일지 모른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투정인 양 무책임하게 내뱉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행동들이 고쳐지지 않으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인연인 것이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면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더라도 그만하는 게 맞다는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결국, 처음과 같이 계속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다.



.

.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야기를 마치고는 홀가분한 듯 미소를 지으며 창 밖을 바라보는 J의 옆모습을 보며

'안아주고 싶다' 생각이 들었고, 달달한 술기운이 용기를 보탰다.


가만히 고개를 돌려 J의 볼에 입을 맞췄다.

J는 깜짝 놀라 찡그린 듯 웃으며 나를 밀쳤다.

그 팔을 잡고 다시 한번, 

이번엔 입술로 향했다.


'아이고~ 내가 이 방에 오는 게 아니었다.

맥주도 다 마셨고 나는 이제 내려가 잘란다~'


우리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다음날 우리는 에게해를 보러 갔다.

아직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바닷가를 둘러싼 옛 성곽 위에 올랐다.






성벽 위 J의 무릎을 베고 누워 책을 읽어줬다.

별 것도 아닌 글귀에 까르르 웃다가도

생각이 깊어지는 문장에 한참 동안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오후엔 시내로 나가 손을 꼭 잡고 아이쇼핑을 하고

스타벅스에 앉아 달달한 커피와 함께 한참을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기다란 벤치에 정수리를 맞대고 누워 있을 때엔

지나가던 포근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우리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멋지게 모델이 되어줬다.









서로는 이 규정되지 않은 사이에 대해 묻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정리되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자칫 섣부른 조바심에 이 즐거운 순간이 방해를 받을까 두려웠다.









다음날 우리는 마지막 일정을 맞이했다.


나는 야간 버스를 이용해 이스탄불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고,

J는 하루 더 머물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내 짐을 모두 J의 방에 옮겨 놨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시린제마을'이었다.







시린제 마을은 셀축에서 버스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과일 와인을 제조하는 가게들이 언덕 마을의 골목골목 숨어있어,

다양한 와인들을 시음하고 직접 살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수줍게 웃기만 하시는 할머니는 구입을 재촉하지 않았고,

몇 잔을 시음하든 웃으며 다음 잔을 권했다.


한 가게에 눌러앉아 취기가 오면 돌아다니다

또 다른 가게에 들러 취기를 올린다.


시골스러운 풍경과 소박한 사람들,

정이 넘치는 작은 언덕 마을이었다.
















시린제 마을에서의 즐거운 낮시간을 보낸 후 양손 가득 값싼 선물용 와인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야간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하는 나를 위해 조금 일찍 저녁 식사를 하러 한적한 식당엘 들렀다.


터키 전통주 라키(RAKI)를 주문했다. 라키는 물을 타서 마시는 술인데 투명한 라키에 물을 부으면 뿌옇게 변한다. 얼음을 타서 마시기도 하는데 매우 독주이다.




마지막 식사를 앞두고 아쉬운 얼굴을 가득한 채

빨간 식탁보가 씌워진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우리는 아직 서로의 연락처 조차 알지 못했다.

J는 경상도의 어느 도시에,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고

무시할 수 없는 물리적 거리 또한 서로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으로 내내 서 있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생기는 순간의 감정일지 모른다는 걱정도 서로의 속내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 사실들이 내내 마음 한구석을 누르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해야 했다.



.

.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이제  헤어지면 다시 만날 방법이 없어.

사실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리고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절대 순간적인 것이 닐 거라는 , 나조차도 확신할 방법없고.


하지만 분명한 ,

지금 네가 많이 좋고,

돌아가면 분명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넌 어때...?'




J는 말을 아꼈다.

고민하고 있었고,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J의 연락처를 원했지만

J도 그걸 원할 때 받고 싶었다.


'그래 일단 그만 이야기하자. 버스 시간 늦겠다.'



.

.



짐을 꺼내러 J의 방으로 들어왔다.

터미널이 바로 근처이긴 했지만 이제 30 남짓한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불안했다.

이대로 헤어지면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가벼운 하룻밤 일탈을 원했다면 J 태도가 달랐을까? 이별의 아픔으로 마음고생한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 같은 ? 에단 호크와 쥴리 델피가 심어  로망에 대한 실현 같은 ? J 떠난, 아니 그렇게 쉽게 놓친 그에 대한 복수 같은 ?


하지만 J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그 경계를 넘어 버렸다는 것을. 

그렇기에 오히려 선택이 어려웠을 것이다.


.

.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로 배낭끈을 조이다

침대에 걸쳐 앉아 있는 J를 돌아봤다.


J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딘지 불편한 모양새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 아쉬워하고 있었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일시적인 건지는 중요치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겨를이 없었다.


J에게 다가가 힘차게 끌어안았다.

우리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 온 사람들처럼

급하게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더 나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더욱 간절한 느낌이었다.


서로의 손과 다리가 숨 가쁘게 엉켜갔고,

입술에 느껴지는 하나하나의 굴곡과 살결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바쁘게 내 입술과 손끝에 J를 담았다.



.

.



잠시 숨을 고르고 시계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J의 볼 위에 내 볼을 얹은 채 귓가에 물었다.


'우리... 이제 정말 어쩌지?'



.

.



버스터미널에는 간신히 도착을 했고,

버스는 당장이라도 떠날 듯 웅웅대며 재촉하고 있었다.


길게 쳐다보면 눈물이 맺힐 것 같았다.

짧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인사말도 없었다.


한국에서 보자, 연락할게, 도착하면 전화해...

  있는 말이 없었다.


'어... 조심히 지내돌아와.  갈게...'

버스에 올랐다.


.

.


두 계단쯤 올랐을 때

J가 나를 불렀다.


가슴이 요동쳤다.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치며 뒤를 돌아보는  손에

작은 쪽지 하나가 건네졌다.




'조심히 가고,,, 연락해라...?'


J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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