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떠돌이 Dec 30. 2019

새벽 세시 십분

금악 오름에 있었다. 이틀 전 만난 한 사람과 함께. - 제주 여행기 1

차를 달려 금악오름의 정상까지 올라갔다.

사방은 안개밖에 없어 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태초처럼 조용했기에 우리밖에 없다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핸드폰의 라이트를 켜야만 겨우 한 걸음씩 땔 수 있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조용히 라이트를 비춰보니 말 한 마리가 안갯속에서 조용히 풀을 뜯고 있었다. 한쪽엔 드문드문 도시의 가로등이 희미하게나마 보였으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느껴지는 건 오직 안개 어둠 습기, 바람.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의 희미한 존재감뿐이었다. 공포감마저 느껴질 정도의 순백색 침묵 속에서, 애써 옆의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하며 걸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자연의 신비를 넘어 경이로움 앞에서 숨이 턱 막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을 때.

이 순간이 그러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순간의 경이로움에 압도되어 그저 맘 속으로 신에게 감사기도만을 드리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내면의 감정이 울렁거리다 못해 폭발할 것 같았다. 나를 채근하지 않으며 침묵을 존중할 줄 아는 상대가 마침 옆에 있었고, 그래서 나는 조용히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제가 무엇을 잘했기에 이런 시간을 주시는 건가요

왜 제게 이런 근사한 선물을 주시는 건가요

외로움을 인생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려는 제게, 상처에 잠 못 이룬 수많은 밤들을 보낸 제게, 왜 이토록 괜찮은 사람들을 계속 보내주시는 건가요.

왜 저를 이 시간 이 공간에 데려다 놓으셨나요.


이토록 강력하게 느껴지는 당신의 존재는 누구 시기에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간절히 구해도 주지 않으셨으며 어둠 속을 걸을 때 빛 한 점 주지 않으셨으면서 이런 순간들을 인생에 툭툭 던져주시는 건가요.

왜 자꾸 잊어가는 내일의 기쁨에 대한 희망의 불씨들을 살려 놓으시나요.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없는 마음의 흥분과 상반되는 평화가 공존하는 그곳에서, 나는 상대방의 가슴팍에 조용히 고개를 기댔다. 순수한 기쁨과 수도자들이 느낄 것만 같은 마음의 평화 속에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변화무쌍한 날씨의 제주, 내일 밤이면 비행기를 타야 하니 체크아웃을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번 여행을 함께 다닌 일행이 알고 지내는 지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여러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나니 사람들은 연예대상을 보며 웃고 있었다. 나와 일행은 이틀 동안의 친절함에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떠났다.

내일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새벽 늦게까지 하는 술집을 찾았다.

제주는 어느 곳을 가도 말 그대로 '핫' 한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분위기 맛집 카페, 음식점, 숙소들. 그중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늦은 시간이지만 술집이 닫는 시간까지 시간을 꽉꽉 채워 앉아있었고 맥주를 꽉꽉 채워 마셨다. 빈속에 맥주가 끝없이 흘러 들어갔다.


그 자리에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곧 따라왔다. 내일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사람이다.


제주에 이렇게 길게 있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연박하는 숙소 없이 이렇게 부지런하게 여행을 다녔던 적이 있던가? 없었다. 부지런한 걸음으로 몸을 던져 한 모든 경험들이 감정을 들뜨고 달뜨게 했으며 그 감정이 꼭 나만의 것은 아니었나 보다. 내일 떠나야 하는 나를 아쉬워하며, 옆에 말없이 묵묵히 내 손을 잡고 앉아있는 사람을 이 여행이 데려다 주었다.


일행을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그가 잠시 어디를 갔다 오자 했다.

그렇게 새벽, 우리는 밤길을 달려 금악오름에 도착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길리섬 여행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