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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Jan 01. 2020

이건 그러니까 썸의 시작인것인가 아닌것인가 나도모르겠다

설렘의 순간 - 제주 여행기 3

바닷가 쪽 문으로 나와 나를 향해 걸어오는 P가 보였다.


제주도의 바닷가, (다른 곳도 아니고 제주도 푸른 밤!) 파도소리, 적당히 늦은 시간과 적당히 취한 술. 이건 그러니까 진짜, 분위기는 정말 좋은데, 로맨스의 요소는 웬만큼 갖춰져 있는데 나는 그가 화를 낼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 한 상황이었다. 고작해야 몇 분이었을 그 시간이 영겁의 시간 같기만 했다.


내 앞에 선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쭈뼛거리며 발 끝만 쳐다본다.

바로 사과를 한다.


-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장난이 과했네요.


굳어있던 표정의 그가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아까 저도 화냈는데 쌤쌤이네요.라고 말한다. 아, 다행이다. 긴장이 탁 풀린다. 아까 화낼 때 정말 무서웠는데.


그런데 떠돌이 씨,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혹시 제가 맘에 드세요?


헐, 이 사람은 깜빡이를 모른다. 훅 들어온다.


- 아.................... 모르겠어요. 그냥 장난치고 싶었나 봐요. 

라며 시작된 이야기는 어쩌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나는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 내가 왜 이러지? 자문해 본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거다. 나를 알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밀어냈던 이 사람에게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거다. 나는 솔직히 말한다.


- 제가 P 씨에게 잘 보이고 싶었나 봐요. 진지한 건 아니었지만 무튼 저를 두 번이나 거절하신 분이라서 그런가 봐요.


그가 나의 말을 이어받는다.


제가 뭐라고, 떠돌이 씨 같은 사람이 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아요. 실은 좋아요. 아까 저녁 먹을 때는 얼굴을 제대로 못 봤어요. 사람들이 너무 둘을 몰아가며 장난을 치기도 했고, 저는 이야기할 때 눈을 보는데 컬러 렌즈를 껴서 (사진발 잘 받으려고 특별히 여행에 가져온 건데..) 눈이 무서웠거든요. 장난은 치는데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있으니까 화가 났나, 일부러 나를 놀리는 건가 싶기도 했어요. 그래도 그 자리에서 화낸 건 정말 미안해요. 아까 나 때문에 분위기 이상해졌죠? (네 이상한 정도 아니고 완전 싸해졌는데요..)

미안하기도 해서 옮긴 자리에서 일부러 마주 앉았는데, 그냥 솔직히 말할게요. 예뻤어요. 아까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떠돌이 씨에게 호감형이라고, 미인이라고 했죠? 네, 그 말도 맞지만 지금 내 눈엔 요목조목 예뻐요. 그래서 내가 왜 저런 사람을 연락 한 번 안 해보고 소개조차 안 받는다 했을까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떠돌이 씨가 내 다리를 더듬는데.. 이건 그러니까..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상황이잖아요. 진짜 말도 안 되는.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한 거예요.


근데 지금 이렇게 나와서 이야기하니까, 사실 더 좋아졌어요. 이야기할수록 더 알고 싶은 사람이에요.

나 솔직히 말할게요. 비행기 날짜가 언제예요? 떠나기 전까지 계속 봤으면 좋겠어요.


하, 그는 정말 깜빡이를 모른다.


술김에 민망함에 혼자 떠든다고 생각했는데, 말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무슨 쉰소리를 하는 건가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는 나의 모든 말을 다 귀담아듣고 있었다. 그런 나를 심지어 매우 좋게 생각해준다. 그의 고백 같은 말들을 듣는데,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너무 춥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은 그는 나의 표정을 살피고 눈치를 본다. 본의 아니게 전세 역전이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들어가자고 한다.


자리로 돌아가니 이미 파장이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다 온 거냐며 사람들이 핀잔을 준다.

옷을 챙겨 입고, 이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런데 아쉽다. 너무너무 아쉽다. 나도 더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추운 밤거리에 앉았다.


맥주를 원샷하고 남은 그의 맥주마저 원샷을 때려가며 추위가 누그러지길 바라지만 아, 바람 부는 제주도의 바닷가는 정말이지 너무너무 춥다. 손이 얼음장이고 손톱은 보라색이다. 그런데 헤어지긴 아쉽다. 이번에는 둘 다 말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순간, 그가 말한다.


떠돌이 씨, 이상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많이 춥죠? 그런데 끝내 숙소 안 가고 이렇게 해 뜰 시간이 다 됐는데 나랑 있는 거 보면 내가 싫지 않은 거란 거 느껴져요. 괜찮으면 우리 집 같이 갈래요? 여기서 별로 멀지 않아요. 아무 일 없을 거고, 그냥 우리 집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 같이 잠들어요.


아, 그는 정말 깜빡이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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