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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돌이 Jan 06. 2020

미치겠다 행복해서

로맨틱 제주 - 제주 여행기 4

사실 나는 지금 제주다. 이 여행기는 저번 주, 그러니까 작년 12월 말 제주에서 생긴 일을 쓴 것이다.

제주를 이상한 마음으로 떠난 지 4일 후, 나는 짐을 풀기도 전에 그대로 다시 제주로 내려와 지금 이렇게 호텔에 반쯤 누워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곧 P를 만나러 갈 예정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하루도 빠짐없이 재미있었다.




최근 딱히 기쁜 일도, 딱히 슬픈 일도 없었다. 일상이 평온했으며 그것의 소중함을 잘 안다. 그렇기에 괜찮았다 큰 감정의 변화 없이 산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번 제주여행은 큰 폭의 감정 변화와 더불어 내면을 마주 보게 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다행인 건, 대부분의 순간이 벅찬 행복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 행복함의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 필사적으로 쓴다. 잊고 싶지 않다.





P는 굉장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킬 줄 알았다.

아침까지 편의점 맥주를 마시다 헤어지기 아쉬워 그의 집에 가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함께 이야기를 하며 잠들었지만 어떤 무례도 범하지 않았으며 내가 불편하게 잠들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덕분에 온수매트에서 여행의 여독을 푸는 꿀잠을 잤는데 어찌나 잘잤던지 온수매트를 구입하고 싶을 정도였다. 밤을 새운 덕분에 오후 늦게 일어나 같이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매생이 갈비탕을 먹는데, 매생이가 입에 묻을까 신경 쓰였지만 열심히 먹었다. 맛있었다. 아, 제주는 왜 이렇게 모든 밥집이 반찬까지 맛있는 걸까? 제주에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맛있는 밥집 때문인지 실은 맘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P에 대한 호감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자리를 옮겨 폐교를 카페로 개조한 곳으로 갔는데 그 카페 커피는 또 왜 그렇게 끝내주게 맛있는지, 분위기는 왜 또 좋은 건지. 나는 비 오는 제주의 길과 작은 카페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 옆엔 내 말을 조용히 들어주는 P가 있었다. TPO가 미치도록 완벽했다. 정말,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어제 만난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일행과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셨다. P가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우리의 목적지를 말해주었더니 시간차를 두고 따라와 주었다. 손을 잡고 마지막 밤의 흘러가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P가 술을 마시지 않은 건, 운전을 하기 위해서였다. 금악오름에 가기 위해서.


새벽 2시, 술집은 닫을 시간이 되어 일행을 숙소로 바래다주고 헤어지기 아쉬웠던 우리는 P가 이끄는 대로 금악오름에 갔다. 그는 별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지만 가득 찬 안갯속에 별은 없었다. 그러나 한 발 한 발 안갯속을 걷던 그 순간, 오히려 내겐 그 장면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신비로웠으며, 꿈속에 있는 것만 같은 몽환적인 기분이 들게 했다. 무언가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경건해지는 자연의 풍경이었다.


마음속에서 절로 기도가 나왔다.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는, 말 그대로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나는 조용히 사방을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내면의 벅참을 느끼고 멍하니 서 있었다. P는 그런 나의 기분을 눈치챈 듯,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옆으로 다가온 P가 말했다.


"떠돌이 씨, 우리 만나 볼래요?"


평소의 나라면 풉, 하고 웃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그 순간 나는 신과 맞닿아 있는 것만 같다.

"너무 벅차서 기뻐요. 좋아서 말이 안 나와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엔 어떤 장난도, 거짓말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할게요."


그는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듯했고 나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또 오랫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나는 자연의 신비함에 감동을 받는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P는 조용한 다정함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장거리 연애는 싫다던, 롱디는 별로라던 그는 다음날 공항으로 왔다. 공항에서 만날 동생이 있어 잠깐밖에 볼 수 없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먼길 오지 않아도 된다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잠깐이라도 보겠다고 공항까지 온 P가 고마웠다. 이제 떠난다. 마음이 이상하다. 같이 온 동생도 이번 제주여행은 떠나는 발걸음이 너무 어렵다 했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나 역시 그랬다.



너무 감상에 젖은 여행이었다.

바닷가의 작지만 아름다웠던 카페도, 약천사의 잊을 수 없는 풍경과 놀라운 스토리도, 공항 가는 길 지는 노을도, 비양도의 차갑고 상쾌한 바람도, 빛의 벙커에서 만난 고흐도, P와 함께 한 모든 시간도 나를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행복했다. 내가 이런 기쁜 순간을 누려도 되나 싶을 만큼 벅찬 순간이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말로는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 그저 일행은 전날 숙소에서 조금 울었다고 했고, 나 역시 약천사에서 태평양전쟁 위령비를 보는데 알 수 없는 마음에 눈물이 줄줄 났다. 그리고 공항 가는 길에도.


공항에 도착한 P를 만나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우리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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