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0년대생 직장인이었다
적고 있습니다.
누구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덤덤히.
내가 느낀 직장과 청춘에 대해서.
그것이 때론 불편한 이야기 일지라도
나는 84년생 쥐띠로서,
전형적인 80년대생의 인생을 살아왔다.
다니던 국민학교가 광복 50주년과 함께 초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가슴속 한편에 아날로그 감성을 품은 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급히 쫓고 있다.
그중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나라의 ‘IMF 경제 위기’ 이지 않을까?
많은 우리네 아버지들이 무너졌고 가정엔 먹구름이 드리웠다. 한창 자아가 형성될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커다란 영향을 받았고,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와 이곳저곳 압류딱지를 붙이던 그 모습은 마치, 고대 로마 폼페이를 덮친 베수비오 화산 폭발처럼 불가항력의 초자연적인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우스갯소리로 지금도 80년대생들끼리 술을 마시면 너도 나도
‘IMF 때 우리 집이 더 힘들었네~’
라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니까.
지나고 나니 그 역시 다 추억이고,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사회생활 좀 해보니까,
불가항력으로 보였던 그 초자연적 현상까지 이겨 낸 부모님에 대한 존경은 커지기만 한다.
그런 내게 어찌 된 영문인지
회사를 다니던 도중, ‘두 번째 IMF 외환위기’가 찾아오고 말았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 이겠냐 만은, 매년 떨어지는 경제성장률과 함께 저성장 시대가 고착화되면서, 많은 기업과 회사들은 최소한의 소극적 고용과 함께 인력 규모 재편 및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조선, 해운업계 이 쪽은 말 다했지 뭐)
내가 다녔던 회사 역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고, 몇 년 간 마이너스에 허덕이더니 결국 결단의 순간에 직면했다. 재료비, 마케팅비 등 다른 수술할 수 있는 곳은 모두 작업하였지만, 손대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숫자는 역시 인건비니까.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무엇이 옳으냐는 논쟁이 있을 수 있으나,
내년은커녕 당장 내일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선 일단 오늘부터 넘겨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전체 인력의 절반 가까이 줄이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각 부서 별로 맞춰야 하는 인원 TO가 내려왔다. 그야말로 직원이 사람이 아닌 하나의 숫자로 보이는 시점이다.
(물론 나는 운이 좋게도 규모가 있는 회사였던 탓에, 다른 계열사로 이동 배치되는 작업 이였지만)
부서 별로 본인이 원하는 지원자를 모집하기도 하였고, 낮은 고과 평가의 인원이나 신입 사원 등이 간택되기도 하였다. 각 부서의 장들은 ‘살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겠냐’는 듯, 당장의 전력에 크게 무리가 없을 옥석을 가리기 위해 고심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소리 없는 눈치게임’에선 퇴사를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고, 누군가는 매년 ‘여러분, 올해도 허리띠를 졸라맵시다!’라는 소리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며, 계열사의 신대륙을 찾아 자원하기도 하였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외치던 그들의 모습은 콜럼버스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사무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동료들의 빈 책상이 늘어갔고, 텅 비어버린 책상들은 마치 어렸을 때 보았던 그 압류 딱지처럼, 이 역시 불가항력의 초자연적 현상인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신이시여, 정녕 저희를 하나의 숫자로만 보려 하시나이까’
하는 원망과 함께 말이다.
그 원망도 이젠 또 다른 술안주 거리가 되어버린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겪었던 그 ‘첫 번째 IMF’가 어떤 심정이셨을까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대자연 앞에 인간은 매우 작은 존재라지만,
직원이 하나의 숫자로 치환되었던 또 다른 ‘자연재해의 현장’을 떠올려 보면,
회사에서도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하루가 다르게 ‘효자’가 되어 가는 나를 보며,
이 정도는 큰 건가? 싶기도.
이상 80년대생의 넋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