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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미테 Jan 23. 2021

땅콩과자

응암동



아주 오랜만에 현금을 인출했다.

한 달 동안 먹기를 벼르고 있었던 땅콩과자를 사러 가기 위해서다. 역 앞 사거리, 은행 맞은편.

같은 구의 맘 카페  자유게시판을  한 시간 동안 뒤져 겨우 알아낸 판매처이다. 맛은 기대 말라는 후기가 있었지만 이미 입속은 그 비슷한 돌이라도 넣어달라 아우성이었다.

현금 5만 원을 낱장으로 뽑아 그중 2만 원을 천 원짜리로 교환했다. 5만 원어치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토요일까지 야근을 하고 맞은 휴일. 오늘이 오기까지 스스로의 기호를 위해 애를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인간 된 존엄을 위해 조금 더 두꺼운 옷을 입을걸 하는 후회가 드는 영하 8도의 날씨에도 30분 거리 노점으로 이를 악물고 걸어가고 있다.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오묘한 거리를 택시를 타지 않고 이동하는 것은 이성이 조금 남아있어서다.


땅콩과자, 한 봉지 25개,  3000원.

동그란 파라솔이 감싼 작은 노점이 시야에 들어왔다

단일품목으로 승부하는 흔치 않은 생과자 노점이었다. 결연한 궁서체의 메뉴판에 왠지 신뢰가 간다.

다행히도 손님은 나 하나였고 진열대에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땅콩과자가 가득 쌓여있었다.


“어서 와요.”


주인아주머니는 과자를 확인하느라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인사를 했다.

기계가 뒤집히고 열릴 때마다 좁은 노점 안이 고소한 땅콩 향으로 일렁인다. 그 바람에 진열대에 있는 것은 물론 갓 구운 땅콩과자까지 탐이 났다.


“이거 다 합하면 얼마나 될까요?”

“한 만 이천 원어치? “

“그럼 지금 굽는 것 까지 해서 다 주실 수 있을까요?"

"왜 안 되겠어. 조금만 기다려봐요."


틀에서 바로 빼내어진 것들과 함께, 총 다섯 봉투의 땅콩과자가 내 손에 쥐어졌다.

따끈따끈한 온기에 얼어붙었던 마음까지 녹는다. 단 돈 만 오천 원의 현금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살을 에는 추위에 손을 밖으로 꺼내놓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참을 자신이 없어 걸어가면서 과자를 먹기로 했다.

그런데 한입 베어 문 과자 안에 땅콩이 없었다.


갈색빛이 돌며 노릇하게 구워진 겉면 안은 부드러운 속살, 그리고 땅콩과자의 정수인 땅콩이 들어있어야 했는데!

두 번째, 세 번째도 공갈이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봉투 안에서도 각각 하나씩 차출하여 확인해보았지만 똑같았다.

노점을 찾지 못해 한 달, 게시판을 눈이 빠지게 한 시간, 집 근처에서 현금인출을 하고 바로 이 근처로 도보까지 약 30분. 많은 고민과 함께 적잖은 시간을 들여 찾아온 결실이 이거다. 평이 안 좋았었던 차원을 넘어 이 정도면 사기 아닌가?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돌아가자. 이건 건강한 거래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정식으로 신고하고 하는 영업이 아닐 테니, 명확환 불공정거래이기도 했다. 노점주가 약자일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모교 앞 분식 노점 아저씨는 아낀 세금으로 벤츠를 타고 퇴근했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한다. 땅콩 없는 땅콩과자의 가격이 한 봉지 3000원이었으면 안 되는 거다.


하지만 막상 다시 마주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추운 날 밖에 서있으면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도 서서히 몸이 식는다. 그럼에도 풀타임 영업을 하는 노점 안에는 땅콩과자 기계에서 나오는 화력 말고는 아무런 난방기구도 없었다. 이런 중에 물에 잠긴 희멀건 밥알을 고추장과 함께 입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 처절한 생존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여전히 손님은 없었다.


"아가씨, 왜요 더 사러 왔어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아무리 벤츠를 타고 퇴근하는 점주와는 상황이 달라도 옳고 그름은 절대적인 것이다. 오랫동안 인생의 지표로 삼았던 빳빳한 신념이 같잖은 동정심을 멀리 밀어냈다.


"땅콩 안 들어있는 땅콩과자 더 사러 왔겠어요?

환불해주시던지, 제대로 다시 해주세요.”


내 말에도 그녀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꿈뻑꿈뻑 눈만 굴리다가 숟가락을 툭 내려놓았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퉤, 손바닥에 무언가 뱉어졌다

이빨이었다.


“이거라도 넣어주랴. “


나는 눈앞의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순 없었지만 땅콩의 부재에 대한 분노가 눈 녹듯 사라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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