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창문을 열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니 상쾌하긴 했다. 그런데 밤 9시 출발 비행기인데 그때까지 뭐하나 싶었다. 미술관이나 가야 하나.
우리 가족은 11시 퇴실 시간에 딱 맞춰서 숙소를 나왔다. 한림 해수욕장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하늘은 우리 편이었다. 신기하게도 비가 딱 그쳐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햇빛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엄마 비 지금 안 오니까 곶자왈 도립공원 가볼까?”
우리는 입장료 총 삼천 원을 내고 숲길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공기의 냄새와 촉감이 달랐다. 빗물을 머금은 나무와 흙이 한층 짙어진 색과 향을 내뿜었다. 이곳에서의 공기를 될수록 많이 흡수하고 싶었다. 숨을 쉬는데 페퍼민트 차를 마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뒤에서 천천히 걷고 있다가 ‘으악’ 소리를 향해 뛰어갔다.
“엄마!"
엄마가 데크길 옆 수풀 속에 빠져 있었다. 나와 동생은 엄마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동생이 여행 브이로그를 찍다가 엄마에게 뒤돌아서 손을 흔들라고 했다. 엄마는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서 손을 흔들며 걷다가 떨어진 것이었다. 다행히도 꼬리뼈나 머리가 아니라 근육이 두툼한 엉덩이가 돌에 찧었다. 엄마는 걸을 때마다 아프다며 엉덩이를 부여잡고 걸었다.
공원 안에 전망대에 도착하니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작은 연못과 황소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다시 출구로 향했다. 엄마가 이번에는 왔던 길 말고 새로운 길로 가보고 싶다며 다른 길로 걸어 들어갔다. 엄마는 엉덩이가 아프다고 하면서 나보다 300m 정도 더 앞서 걸어갔다.
“엄마 천천히 좀 가요. 뭐 그렇게 급하다고. 숲 속을 즐기면서 가야지. 무슨 풀이 있나. 어떻게 생겼나. 향은 어떤가.”
“아. 이제 답답해졌어. 빨리 나가고 싶어.”
나는 아까 걸었던 길보다 더 매혹적으로 느껴져서 걸어도 걸어도 출구가 보이질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사진도 찍으면서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엄마와 동생은 어찌나 재빠른지 보이질 않았다.
엄마랑 동생이 다시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온 것 같다고 이쪽 길로는 나갈 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한참을 걸어 들어왔었지만 나는 아무렴 좋았다. 동생은 출구가 안 보여서 귀신에 홀린 줄 알았다고 했다. 엄마는 하늘이 흐려졌다며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삼십 분 정도 더 걸어서야 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르떼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로에 안개가 뿌옇게 껴서 정말이지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두워져서 비 올 것 같아서 빨리 나가고 싶었어.” 엄마가 말했다. 그녀가 엉덩이를 부여잡고 빨리 걷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대로 늦겨울 비를 몸으로 받아내야 했을 테다.
짙은 안개와 두꺼운 빗줄기를 뚫고 미술관에 도착했다. 이상하게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비를 맞지 않았지만, 비를 맞은 것처럼 몸이 축 처졌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차를 돌려 나왔다. 제주가 우리를 보내기가 아쉬워서 그런가. 몸과 마음에 모든 습하고 우울한 것을 알아차리고 빗물과 함께 여기에 흘려보내고 가라는 건가. 아침에는 빗소리가 참 경쾌했는데 이제는 울적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