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사과가 무척 먹고 싶어졌습니다.
항산화성분이 풍부한 사과는 맛있고 혈당관리에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리초기 사과 한쪽 먹고 잰 혈당수치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개인차와 건강 수준에 따라 같은 음식을 같은 양으로 먹어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때문에 한동안 사과는 물론 모든 과일을 끊어버렸더니 끝내 먹고싶다는 본능이 통제불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 그동안 잘 참았으니 오늘 딱 한 번만 먹자. 그런다고 당장 내 혈관이 터지겠어, 어쩌겠어. 대신 전략적으로 먹어야지. 어떻게?
흔히 껍질이 진국이요, 영양가가 많다고 하니 사과를 먹겠다는 제 말에 어떤 분들은 '아하, 껍질째 먹으려는 모양이군.'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도 깨끗이 씻어서 그렇게 먹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전에 사과 먹고 잰 혈당수치를 잊기 힘든 저는 도저히 껍질채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신 껍질‘만’ 먹었습니다.
베이킹소다를 아낌없이 뿌려서 뽀득뽀득 잘 씻은 사과의 물기를 정성스레 닦아줍니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과도로 천천히 사과껍질을 깎습니다. 포인트는 예전처럼 얇게가 아닌, 조금이라도 더 사과속살을 어떻게든 붙여서 두툼하게 깎습니다. 괜찮아요. 그래봤자 두께 0.2cm도 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사과 한 알의 껍질을 정성스레 깎아내고 그 사과껍질을 먹어줍니다. 이게 웬 청승이고 궁상인가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제법 속살이 붙어있는 껍질만으로도 반년 간 참아온 사과에 대한 갈증이 가십니다. 정답은 역시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인걸까요? 그렇다고 해서 혈당 폭발시키는 망고를 껍질로 먹고 싶진않지만요.
반갑게 사과껍질을 다 먹고나니 이런 자괴감이 듭니다.
웃기고도 슬프지만 어쩌겠습니까. 사과는 먹고 싶고 내 혈관은 지키고 싶고 다른 좋은 방법은 생각나지 않는걸요.
과일은 다 몸에 좋은 줄 아는 분들이 많으신데 실은 과당때문에 과일이야말로 조심해야 할 대상 중 하나입니다. 비타민과 무기질, 식이섬유라는 유익한 성분도 많지만 과다하게 섭취하면 소모되지 않은 칼로리와 과당은 간으로 저장된답니다. 이건 단순히 귤이나 오렌지를 과식해서 일시적으로 손발이 노랗게 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지금은 사과를 껍질과 알맹이 같이 먹지만 관리초기엔 어쩔 수 없이 껍질만 먹는 방법으로 과일식탐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분이 키위도 껍질채 먹는 게 좋다네요?! 전문의료인이 말입니다.
털이 보송보송하고 사과보다 훨씬 두껍고 거칠게 느껴지는 키위를 껍질채 먹으라니요. 난이도가 사과보다 레벨업이네요. 그런데 그 의사말씀인즉 '키위는 사과 못지않게 식이섬유와 영양소가 많고 변비해소에도 좋으며...' 등등 키위의 장점을 알려주시더니 잘 씻어서 껍질채 먹으라고 하십니다. 본인도 그렇게 먹는다면서요. 어째 썩 내키진 않지만 전문가가 그렇다니 한번 믿고 따라 해보기로 했습니다. 사과처럼 껍데기'만' 먹지않고 키위는 껍질'채' 먹어도 된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키위는 까칠한 털 때문인지 볼 때마다 나이많은 과일같습니다. 색깔도 선명한 에너지를 내뿜는 알록달록함이 없어서 다른 과일보다 좀 더 연세가 많으신 느낌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과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베이킹소다로 살살 닦아드립니다. 굵고 단단한 새 솔을 준비해서 표면의 털도 말끔히 정리합니다. 다시 잘 헹구고 키친타월로 물기 한 방울 없이 닦아냅니다. 그리고 보기좋게 썰어서 난생처음 껍질채 키위를 먹었습니다.
처음엔 질긴 키위껍질이 영 어색했지만 서너 조각 먹다 보면 적응됩니다. 과일 선택지가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손해는 아닙니다. 하물며 이렇게 먹는 게 더 좋다니 꿩 먹고 알 먹고입니다. 저는 지금도 키위를 이렇게 먹곤 합니다. 한 번도 탈 난 적 없으니 의사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네요.
껍질과 씨앗에 영양이 많다고 흔히들 얘기합니다. 소위 통째로 먹는 게 좋다고 말이죠. 당연히 꼭지나 딱딱한 통씨앗을 먹으라는 건 아닙니다. 복숭아를 껍질채 먹을 순 있어도 그 커다란 씨앗을 먹을 순 없잖아요. 수박 역시 까만 씨앗을 아무렇지 않게 깨물어 삼켜도 육중한 겉껍질을 먹으라는 얘기는 아니구요.
한때 외국에서 마크로비오틱 식사법이 대유행한 적 있습니다. 장수식(長壽食) 또는 매크로바이오틱스, 매크로바이오틱 다이어트(macrobiotics, macrobiotic diet)라고 하는데 건강 식이요법을 의미합니다. 일본에선 오래전부터 유행했고 일본식 표기법이 마크로비오틱(マクロビオティック)이어서 한국협회에서도 이렇게 표기한다고 합니다.(구글 참고)
유래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마크로(macro, 큰)와 바이오틱(biotic, 생명의)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시작되었답니다. 어원은 히포크라테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네요. 히포크라테스는 지금도 의대에서 선서에 등장하는 분이죠. 히포크라테스는 질병과 식생활, 환경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을 '마크로바이오스, 마크로비오스 macrobios' 라고 했답니다.
제가 당뇨진단을 받기 훨씬 이전부터 일본의 마크로비오틱 식사법을 본 적 있는데 되도록 식재료 전체를 다 먹는다는 뜻이라고 들었습니다. 결국 사과나 키위를 껍질채 먹으라는 게 마크로비오틱 식사법이었나 봅니다.
이미 사과껍질 정도는 실천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키위껍질은 생소하고 너무 우왁스럽고 드센 식사법 아닌가 싶으실수도요. 그런데 직접 해보니 키위도 충분합니다. 이제 저는 배, 참외, 포도도 잘 씻어서 껍질째 먹곤 합니다. 파인애플이나 바나나, 귤을 그렇게 먹진 않구요.
실속 없거나 의미 없을 때 ‘알맹이가 없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일은 대부분 껍질을 버리고 속살을 먹잖아요. 이런 경우는 알맹이없는 알맹이를 먹는다가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