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이로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고 조용히 읊조리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단어.
나에게 그런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이 임신 기간 내내 무겁게 느껴졌는데 막상 아기를 만났더니 - 내가 반드시 삶을 다해 너를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솟아난다.
신비로운 일이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인데 생각의 기준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것은. 물론 지금도 한 아이의 엄마로만 살지는 않겠다(그럴수도 없고) 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나 자신으로 살면서 온 힘을 다해 내 딸과 가족을 사랑하는 일 앞에 담대할 자신이 생겼다고나 할까.
사랑을 주는 것만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심지어 병원이라 품에 안아 본 것은 1시간도 채 되지 않는데. 그 잠깐의 눈맞춤과 작은 숨소리가 나에게 힘을 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저 아이가 사랑할 힘과 부지런히 삶을 마주할 용기를 준다.
내가 나의 엄마에게 정말 자주 묻는 것 중에 '도대체 셋을 어떻게 키웠어'가 있는데 그 질문 속에는 상당부분 '도대체 그만한 희생을 어떻게 감당했어'가 담겨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웃으며 그러게 말이다, 하시는데 셋을 낳고 길러낸 삶에 대해 후회라거나 아쉬움은 눈꼽만큼도 없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도 분명 하고 싶은 게 있었을텐데, 를 속으로 삼키면서 자란 나에게 오늘 그 답이 나타났다. 희생으로만 이해했던 엄마의 삶은, 어쩌면 나와 동생들로 인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풍요로웠겠구나.
엄마는 세상이 무엇을 건네도 맞설 수 있는 에너지 주머니를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주렁주렁 달고 있구나.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 나를 갉아 쪼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만큼 확장시키는 일임을 깨닫는다. 부모가 되면서 어른이 된다는 말은, 성장기에 키가 자라는 것처럼 나의 모든 영역이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엄마로, 아빠로 자라난다는 뜻인가 보다.
엄마로서 0살이 된 나의 새로운 삶이 기대된다.
이 작은 아이와 함께 바라볼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일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