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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셔니스타 Dec 22. 2023

원숭이 나라 언어 통역사, 영균이

장차 촘스키 같은 위대한 언어학자가 될 소중한 인재의 어린 시절 관찰기

초등학교 4학년인 장난꾸러기 영균이는 무척 귀가 밝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쏙쏙 골라 듣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내일부터 주말이니까 과제를 좀 내겠다. 집에서 꼼꼼하게 잘 풀어와.”라는 내 말에 영균이는 “내일부터 주말이니까 과제를 안 내겠다. 집에서 꼼꼼하게 잘 쉬다 와.”라며 슬쩍 말을 바꾼다. “균아, ‘집에서 꼼꼼하게 잘 쉬다 와’는 이상하지 않아? ‘편안하게 잘 쉬다 와’라고 하는 게 더 잘 어울리잖아.”하고 딴지를 걸면 “꼼꼼하게 쉬는 거나 편안하게 쉬는 거나 그게 그거죠.” 우스갯소리인 줄 알지만 이상한 단어를 만들거나 조합할 때는 영균이 몸에 세종대왕이 빙의했나 싶은 어이없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출처 unsplash

 요즘 영균이 클래스에서 <The Monkey's Paw>라는 책을 함께 읽고 있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신비한 원숭이 발을 우연히 얻게 된 한 가족이 있다. 늦둥이 아들 덕에 행복하긴 하지만 평생 가난했던 노부부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소원 하나를 빈다. 바로 3만 파운드를 갖는 것이다. 오랜 상의 끝에 소원을 빌고 나니 '끼익' 문소리만 나도 드디어 행운이 찾아왔나 싶어 눈길이 가고, 바람 소리만 나도 괜히 창밖을 보게 된다. 결국 소원이 이루어졌지만 3만 파운드는 잔인하게도 아들의 목숨값으로 얻게 될 돈이었다. 아들을 잃은 노부부는 슬픔에 겨워 다음 소원을 빈다. 다음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아이들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원숭이 발 이야기에 꽤 흥분한 모습이었다. 뒷이야기를 미리 읽어 올 정도로 열중해서 재미있게 책을 읽었다. 40페이지 분량이지만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빽빽한 책을 처음 읽을 때는 하도 더듬거려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두 권째인 지금은 별다른 설명 안 해줘도 술술 잘 읽어내고 내용도 잘 이해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재미있었다. 그 가운데는 꽤 어른스럽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나를 놀라게 하는 아이들도 있다.

문제는 영균이었다. 수업 시간에 <The Monkey’s Paw> 책을 꺼내라고 하면 “네! 우끼끼말이죠?”하며 만담 하는 개그맨처럼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를 빌어 대꾸했다. 아마도 원숭이 발을 소재로 한 책이라 ‘우끼끼’는 원숭이들이 지르는 소리를 나름 의성어로 만든 단어 같았다. 처음에 다른 아이들이 “응? 우끼끼?”하고 반응하는 걸 보고는 신이 났는지 몇 주가 가도록 똑같은 열띤 반응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 책을 읽고 다른 아이들이 진지하게 대답할 때도 영균이는 원숭이 나라 언어를 쓰면서 “우끼끼”를 각기 다른 억양으로 소통하려 애썼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나머지 아이들의 반응은 차츰 시들해졌다. 시들하다 못해 이젠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는 고요한 겨울 나라에서 책을 꺼내는 몇 초 사이 “우끼끼”를 열댓 번도 더 연발하는 영균이. 한두 번은 가슴에 돌을 매달고 허벅지를 찔러대며 참았으나 이어지는 소리는 소음 공해가 따로 없었다. 목요일 수업 시간에 또 슬며시 “우끼~”하고 영균이의 목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찰나 내가 말했다.

“하나도 안 웃기거든. 선생님을 빵 터지게 할 만한 우스갯소리를 가져와서 다시 한번 도전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오늘은 그만 입을 닫거라.”

괜히 그런 소릴 한 걸까? 그날 수업하다 무슨 재미난 아이디어라도 떠올랐는지 실눈을 하고 히죽거리는 영균이! 보아하니 나를 웃길 야심 찬 우스갯소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주옥같은 말도 듣고 싶은 대로 필터링 해서 듣는 영균이, 늘 혼자 이상한 포인트에서 빵 터져 개굴대는 미래의 촘스키 영균이는 정말 청개구리 같은 놈이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아이다. 그나저나 다음 주 월요일에 분명히 괴상망측한 의성어를 또 준비해 올 텐데 어떻게 반응해 줄까 걱정이다. 그럼에도 이 묘한 기대감은 뭐지?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언어학자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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