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내게 다가 온 한 줄기 빛
“왜요? 영주 씨 무슨 일 있어요?”
내 고단한 표정에서 풍기는 침울한 냄새를 맡은 듯 선생님은 수업이 대수냐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 오셨다. 선생님은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그즈음 자신을 가장 옥죄는 일에 대해 하나씩 말해 보자고 하셨다. 나는 한참 머뭇거리다 가장으로서의 무게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더듬더듬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책을 읽으면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해서 여기 오게 된 거예요.”
웃으면 하회탈과 꼭 닮은 선생님은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때로는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던 무형의 단단한 덩어리를 밖으로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선생님은 내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시며 한숨을 크게 쉬셨다. 잘하고 있다는 둥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둥 들으나 마나 한 조언 대신 어깨로 전해지는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에 내 눈은 호수가 되어 넘쳤다.
“동지를 만난 기분인데요?”
휴지로 눈물을 닦아내다 말고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나 나올 법한 선생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중매로 만난 남편과 결혼했다. 교육자 집안인 것도 마음에 들었고, 남편의 서글서글한 눈매와 수더분한 인상도 좋았다. 나이가 좀 많긴 했지만, 제조업으로 자리 잡은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결혼하면 깨 쏟아지는 신혼 생활이 이어질 거로 생각했던 선생님의 야무진 꿈은 신혼 첫날부터 산산이 부서졌다. 1년만 시부모님께 살림 배워 분가하자던 남편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결혼 전 교양 넘치고 우아해 보이던 시댁 식구들은 고혈을 빠는 흡혈귀로 변했다. 청소, 요리, 빨래부터 시부모 수발까지 하며 큰 집을 혼자 쓸고 닦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갔다. 반찬 투정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끼니마다 갓 지은 밥과 새 국을 올리지 않으면 시부모는 수저조차 들지 않았다.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친정에 둥지를 틀고 살다시피 하면서도 손끝 하나 달랑하지 않는 시누이 식구의 빨래와 음식도 선생님의 몫이었다. 장학사인 시누이는 바쁘다는 핑계로 돌쟁이 아이까지 맡겼다. 선생님은 아무런 내색 없이 조카를 자신의 아이와 함께 키웠다. 엄마인 시누이보다 외숙모인 자신을 더 따를 정도로 넘치는 사랑을 주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 모르고 덜컥 시집와서일까. 그녀는 다들 그렇게 살겠거니 생각했다. 남편은 새벽밥 먹고 나가면 술이 떡이 되어 밤이 늦어야 들어왔다. 외박도 밥 먹듯 했다. 아무도 선생님 곁에서 힘이 되어 주지 않았다. 옷만 갈아입고 나가는 남편에게 싫은 내색이라도 비추면 그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돈 봉투만 휙 던져 주었다.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심산이었다. 몸이 아무리 아파도 따뜻한 말 한마디는커녕 병원 한번 가보라는 말이 없었다.
선생님은 점점 지쳐갔다. 그렇게 영혼 없이 숨만 겨우 쉬고 살던 어느 날, 남편이 뜬금없이 이혼을 요구했다. 뻔뻔하게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으니 합의하고 조용히 집을 나가달라 말했다. 선생님은 시댁 식구들에게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팔은 안으로 굽었다. 그들은 오히려 ‘네가 마누라 구실을 제대로 못 하니 쟤가 겉도는 거’라며 제 식구를 싸고돌았다.
아이만이라도 키우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지만, 경제력이 없으니 양육권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며 오히려 협박했다. 딸이 이혼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던 친정 부모님마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10년 넘게 가정부로 부리던 며느리에게는 위자료도 아까웠는지 시부모와 시누이는 남편과 선생님을 이간질했다. 애초에 약속한 쥐꼬리만 한 위자료조차 절반도 못 받고 쫓겨났다.
혼자가 된 선생님은 갈 곳이 없었다. 혼자 살던 이혼녀 친구와 연락이 닿아 그녀의 원룸으로 옷가지만 챙겨 들어갔다.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살림만 살았지 제 손으로 돈 한 번 벌어본 일 없던 선생님은 앞날이 막막했다. 집에서는 도우미만도 못한 삶을 살았지만, 밖에 나가면 사장 사모님으로 불렸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그녀의 정체성이 흔들렸다.
지옥 같던 삶에서 벗어나 그녀에게 남은 건 ‘정재은’이라는 이름 세 글자뿐이었다. 그날 밤 친구가 “야, 정재은!”하고 10년 넘게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녀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에 북받쳐 밤새 울었다. 힘든 시집살이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 그나마 삶의 낙이었다. 몸이 아무리 고단하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날도 선생님은 읽고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친구네 집에서 새 출발 하던 날 밤, 선생님은 이제부터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겠다고 지금껏 못 누린 행복을 누려보겠다며 노트 한 면을 빼곡하게 채우며 다짐했다. 친구 소개로 학습지 교사 일을 시작했다. 남보다 한발 늦었지만, 사회 초년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혼자 힘으로 번 돈이 생겼다. 다음에 아들을 만나면 운동화 한 켤레 사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었다는 뿌듯함에 선생님은 처음으로 삶의 보람을 느꼈다.
가끔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부모의 이혼 과정에서 마음을 다쳐 버린 데다 사춘기까지 심하게 온 아들은 엄마를 내내 무관심으로 대했다. 엄마의 입장을 제대로 설명하려 무던히 애썼지만 아이는 아예 귀를 닫아 버렸다. 기숙사 있는 고등학교와 서울 소재 대학으로 진학한 이후로 점차 데면데면해지더니 가끔 전화 통화로 안부만 물어올 뿐이었다.
선생님은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순순히 이혼 합의서에 도장 찍고 바보처럼 쫓겨났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화병이 나듯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올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 검진을 받던 중 갑상선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아들도 못 보게 된 데다 살아갈 희망조차 잃어버렸는데 암까지 걸렸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조기에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의사의 위로를 들으면서도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모든 걸 다 잃고도 한 자락 남은 행복을 찾아보겠다는 노력이 부정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살아서 무얼 하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은 욕망이 불쑥불쑥 일었다. 회사 초청 강연회에서 박성후 대표를 만나게 되었고 힘든 시절을 버틴 힘이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 자락 한번 추슬러 보려고 시작한 뒷산 오르기가 선생님의 건강 비결이 되었다. 전국의 이름난 산에 다니며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려 노력했다. 아픔을 잊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지루한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드디어 선생님은 암 완치 판정을 받게 되었다.
“우리 이제 얼굴 그만 봅시다. 지금처럼 운동하고 관리 잘하셔야 합니다.”
만면에 흐뭇한 표정을 띤 의사에게서 기쁜 소식을 듣고 진료실을 나왔다. 대학 병원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자꾸만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때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자신을 못살게 굴던 시어머니와 시누이였다.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장소에서 그들을 만나자 선생님은 멈칫했다. 지구도 자전과 공전을 멈춘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하던 짧은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어머니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선생님의 머리채를 움켜쥐며 새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 못된 년! 너 때문에 내가 암에 걸렸어.”
추운 겨울날 두꺼운 이불을 둘둘 말아 빨래통에 집어던지며 세탁기 절대 돌리지 말고 발로 자근자근 밟아 깨끗이 빨아 말리라던 시어머니의 표독스러운 얼굴은 그때 그대로였다. 동창 모임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어디 결혼한 새댁이 버릇없이 시부모를 두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냐며 입에도 담지 못할 욕을 하던 그 얼굴은 1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시댁 식구가 밥 먹고 나면 홀로 주방 구석에 쭈그리고 서서 급하게 먹다 체해 손가락을 따곤 했던 수많은 날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잘 지내냐는 말 한마디쯤은 건넬 거라 기대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선생님은 기가 찼다. 참고 참았던 분노가 끓어올랐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선생님은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던 그 옛날 어리바리 정재은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채를 붙잡은 시어머니의 손을 드세게 뿌리치며 더 큰 소리로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게 왜 제 탓이에요? 자업자득이죠.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천벌 받은 겁니다, 천벌이요!”
“아니, 이 년이 미쳤나?”
옆에서 말리던 시누이가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었다.
“야! 자기 새끼도 건사 못하는 년이 장학사는 무슨 장학사? 너 같은 년 때문에 우리나라 교육이 이따구지.”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선생님이었다. 웅성거리던 병원 로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모든 사람의 눈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번잡하던 소리가 잦아들자 모두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시누이는 화가 나 씩씩거리는 모친의 팔을 잡아끌어 좌우를 살피며 조용히 사라졌다. 속이 후련했지만, 질긴 악연이 언제쯤 끝날까 싶은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선생님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점점 숙연해졌다. 드라마 한 편을 빨리 감기로 본 느낌이었다. 고구마 백 개는 족히 먹은 듯 갑갑했던 가슴이 사이다 펀치 한 방으로 시원하게 마무리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 사연 앞에서 가장이 되어 힘들다느니 월급이 3개월이나 밀렸다느니 하는 내 이야기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만큼 귀여운 투정일 뿐이었다. 도대체 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지독하게 굴곡진 삶을 인내하며 살아왔을까? 조금만 힘들어도 인생 다 산 듯 죽상을 짓던 나는 담담한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뭐라고 할 말이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힘든 시간을 털어놓고 나니 묘한 연대감이 생겼다.
3편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