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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같은 네 얼굴 [1]

내 딸 서영이는 캠퍼스 패셔니스타

by 패셔니스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서영이가 상기된 얼굴로 방에서 뛰어나왔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딸아이의 팔에 치마가 들려 있었다. 블랙 스트라이프 상의에 부드러운 질감의 스커트가 차르르 떨어지는 단아한 원피스였다. 아이는 내 팔을 잡아끌더니 제 방으로 데려가 옷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모들이 치마랑 블라우스랑 재킷이랑 코트도 사 줬어요.”


그날 서영이는 마중물 진영 이모네 학생들과 실내 동물원에서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이모들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매장에 들어선 이모들은 서영이의 평생소원이던 원피스를 고르느라 수십 벌을 입혀 이리 보고 저리 보았다. 오랜 시간 고심한 끝에 서영이의 통통한 몸매를 커버해 주면서도 제법 어울리는 얌전한 옷 여러 벌을 사주었다.

나는 서영이에게 때가 덜 타는 무채색 컬러의 티셔츠와 청바지만 사주곤 했다. 딸아이는 짧은 치마 차림으로 긴 생머리를 흩날리는 여학생들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곤 했지만, 딸의 육중한 몸매에 하늘거리는 치마라니, 나에게는 안될 말이었다.


“엄마도 옛날에 진짜 뚱뚱했는데 대학 가니 살이 쏙 빠졌어.”


매일 아침 체중계 위에 올라가 어제와 다름없는 몸무게를 확인하며 한숨 쉬는 딸을 볼 때마다 똑같은 말을 재생시켰다.


“서영이도 대학 가면 살 빠질 거야.”


그 말이 딸아이에게 대학만 가면 저절로 살이 빠질 거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하지만 대학 간다고 살이 저절로 빠질 리가 있나. 아침 9시부터 시작하는 강의를 듣기 위해 고3 때나 다름없이 이른 시간 집을 나섰더랬다. 드넓은 캠퍼스를 힘든 줄 모르고 누비고 다녀서인가, 나는 대학 입학 후 몇 달이 지나자, 살이 빠지고 젖살도 내려 아가씨 태를 꽤 갖춘 모습이 됐다. 대학 가면 살이 빠질 거란 말을 들은 그때부터 서영이에게 대학은 살을 빼서 예쁜 옷 입게 만들어 주는 다이어트 센터가 되어 버렸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인 요즘, 발달장애아인 딸을 굳이 비싼 대학에 보낼 필요가 있을까 싶어 나는 특수학교 전공과 입학전형에 대해 알아보았다. 입학설명회에 참석하고 전공과 담당 선생님과 면담도 했다. 그런 나와 달리 남편은 서영이를 대학에 보내고 싶어 했다. 투입 대비 산출이 높지 않으면 비효율적이라 생각하는 나와 딸아이 교육에 들어가는 돈은 절대 아까워하지 않는 남편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진학할 수 있는 여러 방향을 소개했을 때 이미 남편의 세뇌 공작에 단단히 빠져든 서영이는 두 손을 불끈 쥐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서 살 뺄 거예요.”


친구들이 수시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닐 즈음 서영이도 대구대 K-pace 센터에서 면접을 보았다. 대구대학교는 장애인 특수교육 분야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K-pace 센터는 대구대학교 내 평생교육원이다. 서영이 같은 발달장애인 학생들이 자립과 직업 교육을 받는 고등교육 기관으로 기숙사와 캠퍼스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면접 한 달 전부터 서영이에게 자기소개를 연습시켰다. 서영이가 큰 소리로 또박또박 자기소개 연습하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주 서영입니다. 경북여자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저는 음악감상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는 아이유의....”


매일 밤 10번 이상 반복한 후 서영이는 거실로 나와 우리 앞에서 연습한 내용을 큰 소리로 읊조렸다. 그런 아이의 열정 앞에서 면접은 K-pace에서 보지만 다른 학교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면접 당일이었다. 전국에서 온 아이들과 학부모,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여 대기실이 북적거렸다. 부모의 코칭을 받으며 앉아 있던 아이들은 저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영이도 준비한 자기소개를 작은 소리로 되뇌며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면접 장소로 인솔되어 아이들이 자리를 뜨자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20년 동안 노심초사 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워왔을 부모들의 얼굴이 그제야 보였다. 걸음마가 느리고, 말이 늦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고, 티키타카가 되지 않고,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고,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을 아이들. 초중고 12년 동안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하는 아이를 등교시켰을 마음들이 보였다. 혹시나 학교에서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가슴 졸이며 긴 하루를 보냈을 부모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짝 고개 숙이며 미소 지었다. 이 아이들이 새로운 세상에 나가 많이 깨지고 다치는 동안 부모인 우리는 또 얼마나 단단해져야 할까.


합격 발표가 나고 등록금을 납부했다. 한 학기 180일 중 겨우 절반 수업을 듣자고 400만 원을 내야 한다니. 송금 버튼 누르는 손이 덜덜 떨렸다. 내 나이 50대 중반, 같은 시기에 학원업을 시작했던 친구들은 힘에 부친다며 일을 슬슬 정리하지만, 나는 이제 겨우 노후 대비를 시작하여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지도 못하니 서글픈 생각부터 들었다. 하물며 앞으로 몇 년 더 딸아이 등록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이라니.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가 저리 좋아하니 말이다.


서영이는 겨울 방학 전부터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린빈과 바나나, 땅콩버터와 강황을 넣어 만든 주스를 마시고 등교했다. 학교 급식으로 점심을 먹은 후 저녁 식사로도 주스를 마시고 줌바댄스를 다녀왔다. 방학이 되자 식단과 운동 계획을 세워 나를 들볶았다. 눈만 뜨면 다이어트 주스 타령을 해대니 나는 새벽 북클럽에 참여하다가도 중간에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해야 했다.


시계처럼 정확한 딸아이는 매일 정한 운동시간이 되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저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는데 왜 살이 안 빠지는 거지?’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 등록하자고 해도 음악 들으며 밖에서 걷겠다 고집 피우던 서영이는 갑자기 몰려온 엄청난 한파에 며칠 외출을 하지 못했다. 그제야 자기도 헬스장에 등록해 달라고 했다. 나는 딸아이와 함께라면 적어도 운동 거를 일은 없겠다는 생각에 내심 좋았다.

운동 첫날이었다. 러닝머신 사용법을 알려주려고 서영이를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게 했다. 전원을 켜고 시작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서영이가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악, 무서워요. 너무 빨라요. 저 내려갈래요.”


멈춰 있던 러닝머신이 갑자기 움직이자 놀란 모양이었다. 속도를 1에 맞추고 굼벵이처럼 걸으며 바이킹 가장자리에라도 탄 듯 고함을 질러대니 모두 운동하다 말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속도 레벨을 하나라도 더 높이려는 나와 겁을 집어먹은 서영이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래서 운동이 되겠어? 속도를 좀 더 높여야지.”


“안 돼요. 무서워요.”


매일 한 시간씩 걸으러 나가던 아이의 몸무게가 왜 제자리인지, 아니 점점 더 느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운동하러 나간다는 핑계로 내 눈을 피해 유튜브를 실컷 했거나 음악 들으며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을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속도 1에서 걷자. 조금 익숙해지면 내일은 2에서 한 번 걸어볼까? 엄마 좀 봐. 속도 1이나 2나 똑같아.”


나는 서영이 바로 옆의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속도 2에 맞춰 걷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개 돌리는 것도 무서워 손잡이를 더 세게 잡고 벌벌 떠는 딸아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속도 1에서 30분을 기어이 채우더니 서영이는 자전거로 옮겨가 20분 동안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우리 모녀는 마주 보는 스트레칭으로 운동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속도를 조금만 더 높여 보자고 손가락 걸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나는 서영이 옆에서 함께 걸으며 속도 2와 3이 별 차이가 없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다. 서영이는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내가 걷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속도를 1에서 2로 찔끔 올렸다.


이윽고 제 눈에도 우리 둘의 속력이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던지 아이는 과감하게 속도를 3으로 높였다. 그 용감함에 물개박수 치려는 찰나 아이는 미세하게 빨라지는 걸음 속도에 깜짝 놀라 속도를 다시 1로 내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영이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조금만 더 빨리 걸어 보라고 독려했다. 지칠 줄 모르는 엄마의 응원에 서영이가 드디어 속도를 3으로 올렸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3으로 걷고 있어요.”


서영이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얼굴 가득 미소 지었다. 아이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볼우물이 곱게 패었다. 나는 우리 딸 진짜 대단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나는 서영이의 작은 성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아이는 매일 헬스장에 다니며 러닝머신과 친해졌다. 가끔 헬스장에 함께 가면 서영이는 제법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러닝머신 위로 올라가 속도 4나 5를 유지하며 열심히 걸었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그 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의 결말처럼 ‘2개월 동안 흘린 피땀 눈물로 서영이는 날씬해졌습니다.’라고 끝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한의 추위에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은 무쇠 체력, 내 딸 서영이. 딸의 체격은 무슨 영문인지 점점 더 탄탄한 허벅지와 뱃살을 과시했고, 서영이는 1kg도 줄지 않은 몸무게 그대로 기숙사로 향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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