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실험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5월 중순부터 때 이른 더위 때문에 식물들이 스트레스를 받는가 싶더니 집사의 불찰인 과습으로 상추 몇 대는 결국 요단강을 건너 가버렸다. 너무 덥다가 갑자기 추웠다가 며칠 연달아 비가 지나가다가 변덕스러운 날씨로 습기를 잔뜩 먹은 흙이 도무지 마르질 않는다. 한 번 무너진 균형을 바로잡기란 그만큼 힘든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베란다 실험실을 닫아버리고도 싶은 내 마음에 그래도 위안이 되어주는 기특한 녀석들이 있다. “바질”. 멋모르고 추운 날씨에 씨를 뿌려 발아하기까지 그렇게 애를 태웠다. 베란다에 있던 녀석들을 실내로 들여놓고 이불을 덮어주고 그것도 부족해 등까지 켜주며 어떻게든 발아시켜보려고 아등바등 한동안 힘을 썼다. 나의 관심과 시간을 먹고 겨우겨우 발아가 되어서도 녀석들은 금방 마음을 열지 않았다. 어린아이 새끼손톱만 한 새 싹을 내놓고도 어찌 그리 꿈쩍을 안 하던지. 몇 날 며칠을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봐도 늘 그 모양 그 꼴이었다.
그러던 녀석이 사춘기 아이 뒤늦게 철 들 듯이 다른 아이들이 다 시들해질 무렵부터 나 홀로 폭풍성장을 시작했다. 떡잎 위로 삐죽 올라온 잎의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그 위로 새 잎이 나면서 한 단이 올라가고 다시 단 하나가 더 커졌다. 푸릇푸릇한 바질 잎을 보고 있으면 눈이 즐겁다. 향은 또 얼마나 좋은지 물을 주다가 해를 따라 화분을 옮기다가 잎을 건드리면 그 상큼함에 코가 즐겁다.
씨를 뿌리고 어느 정도 클 때까지도 몰랐던 사실인데 내가 뿌린 씨앗은 “라임 바질”이다. 산성시장 종묘상에서 파는 바질 씨앗을 고민 없이 사다가 뿌렸으니 그저 바질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바질이라고 다 같은 바질이 아니란다.
바질은 종류가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가장 흔한 것은 “스위트 바질”이다. 동글동글하고 뒤집어진 바가지처럼 볼록한 잎이 특징이다. 우리 베란다 바질도 처음 나올 때는 작은 잎이 볼록했다. 다만 모양이 동그랗다기보다 길쭉한 타원형이었다. 그런데 잎이 자랄수록 불룩한 배가 점점 평평하게 펴졌다. (정작 납작해지길 빌고 또 비는 내 배는 평평해질 기미가 없는데...ㅠ) 그때까지도 그냥 그러려니 바질이 다 그러려니 했다. 나의 멘토 식집사 선배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내가 사서 식집사 선배와 나눠 뿌린 바질은 “라임 바질”이고 라임 바질은 잎이 일반 바질에 비해 길쭉하고 평평하며 맛은 좀 떨어지지만 스위트 바질보다 상큼한 향으로 이름값을 한단다.
그러고 나서 찾아보니 바질은 종류도 다양하고 맛과 향, 잎 모양과 색깔도 엄청 다양하다. 대부분 1~2년 살이 풀이지만 목질화 되는 다년생 바질도 있다. 맛과 향이 다양하니 쓰임도 다양하다. 참 알수록 신기한 식물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바질이 어느 정도 크고 나면 순을 잘라줘야 한다. 그래야 I자 모양이 아닌 Y자 모양으로 자라면서 더 많은 바질 잎을 생산해낸다. 순을 자르는 것도 정해진 위치가 있다. 아랫부분에 큰 잎이 6개 이상 달렸을 때(3단 이상 컸을 때) 정확한 성장점을 잘라줘야 한다. 성장점이란 위로 줄기가 뻗는 동시에 양쪽으로 새 순이 달린 자리다. 위로 올라가는 줄기를 잘라주면 양쪽에 달린 새 순이 크면서 Y자 모양이 되는 것이다. 자른 줄기는 물꽂이를 했다가 다시 심으면 잘 자란다는데 나는 자른 족족 먹어버렸다.
바질은 물이 많은 환경을 좋아한다. 날이 더워지면 점점 더 잘 자란다. 상추가 스트레스받을만한 환경을 바질은 오히려 편안한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거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몇 년 전인가 식집사 선배가 준 모종 두 개로 여름 내내 바질을 실컷 먹은 기억이 있다. 지금 베란다에 바질이 아홉 대 있고 이번에는 키우는 방법을 좀 더 공부했으니 올여름엔 엄청난 양의 바질을 수확하지 않을까? 바질 페스토를 만들어 두어야겠다.
봉두난발 루꼴라를 데리고 가서 잘 키우는 집에 바질도 같이 뜯어먹어보라고 보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