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February. [눈 떠보니 선진국]을 읽고 나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아니 난 국민학교 학생이었다. 수업시간에 수업을 하지 않고 축구경기를 봤던 것 같다. 94년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으로 기억한다. 유럽의 강호 스페인과의 1차전에서 2:0으로 지고 있다가 홍명보의 중거리슛과 서정원의 동점골이 터질 때 난 누구보다 큰 환호성을 지르며 교실을 뛰어다녔었다. 물론 선생님한테 잡혀 혼났었다. 그게 내가 가장 오래된 처음으로 기억하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글로벌한 삶을 동경하지 않았다. 영어공부에 크게 매력도 못 느꼈고 팝송도 잘 듣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는 그저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에서 나오는 대중가요들이 더 좋았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남들 다 공부하는 토익도 하지 않았고, 교환학생, 유럽 배낭여행 등의 로망도 꿈꾸지 않았다. 사실 영어도 잘 못한다. 그보다는 동아리방에서 만나는 동기, 선후배들과의 소박한 하루하루에 더 집중하고 신나 했던 것 같다.
그러다 건축/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대학에서 건축/디자인을 가르칠 때 대부분 서양의 유명 건축가나 디자이너들의 작품들로 공부한다. 그나마 동양이라고 해도 일본 정도일 뿐이다. 신기할 만큼 국내 건축가나 디자이너를 다루지 않는다. 난 그게 그냥 별로였던 거 같다. 개인적으로 서양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보다 난 좀 더 현실적인 사례가 궁금했다. 그래서 국내 건축가/디자이너들을 찾기 시작했고, 김수근, 김중업 같은 건축가들의 책들을 찾아서 사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디자인을 좀 더 잘하고 싶어서 ACA(asia creative academy)를 선택했다. 선택의 가장 큰 이유는 우연히 접한 커리큘럼에 나오는 아시아의 디자이너들을 직접 만날 수 있어서였다. ACA를 다니면서 건축가 승효상, 브랜드 디자이너 손혜원, 사진작가 배병우, 캘리크라피 강병인, 무인양품 하라켄야, 커뮤니티 디자이너 야먀자키 료등 실제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을 직접 만나 강의를 듣고 워크샵을 했다. 책 속에서 글이나 사진으로 읽히고 이해되는 언어보다 더 매력적이고 가깝게 느껴졌다. 그 학습을 통해서 세계 속에서 결코 뒤지지 않은 우리 디자인의 태도나 방향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의 태도를 가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꽤 비싼 학비를 내고 자발적으로 다녔지만 아직도 그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전부터 역사책 보다 드라마를 더 좋아했고, 건축/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미술사를 가장 싫어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눈앞에 보이는 서사에 좀 더 흥미를 느끼고 재미있어했던 것 같다. 지금도 깊이 있는 지식을 쫓기보다는 얇고 넓지만 내 생활 주변의 현상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 더 집중하려 한다. 그래서 국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건축/디자인 영역의 사례들을 나의 경험으로 많이 수집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런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자신한다. 그 과정 속에서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해서 꿈의 무대에 도전하고, 손흥민이 이어서 등장하며, BTS가 빌보드 차트를 씹어먹고 블랙핑크 멤버들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뮤즈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건축/디자인도 같이 문화적 성장을 이루어내었다. 예전에 부러워만 했던 어느 유럽 길거리에서 보았던 작지만 자신의 브랜드 경험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었던 공간들을 이제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나의 주변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사람들이 세계 속에서 우리만의 플레이를 하고 있다. 강호 스페인과의 무승부로 시작된 나의 대한민국은 어느새 우연히 박태웅 의장(지은이)의 칼럼을 읽고 나서 이 생각에 대해서 더 확신을 가졌고 이 책을 만나고 나서 더 자신감이 생겼다.
빠른 민주화를 이루어 내고 '빨리빨리'문화가 있는 대한민국은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지금까지 왔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이들의 성공도 맛보고, 어떤 이들의 희생의 값을 치러내며 지금 이 자리에 서있다. 모든 사안에 대해서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듯이 그 빠름의 속도 준 값어치만큼 아직 치러야 할 사회적 부채들이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빠른 민주화/산업화로 인하여 우리가 배우고 익히지 못한 것은 '정의하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는 성과를 만들기에 바빴다. 잠시라도 쉬지 않고 연습하고 일해서 세계 속에서 인정받을 만한 성과를 만드는 게 최우선적인 목표였다. 일부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빛나는 성과가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보이지 않은 사회적 합의 속에서 우리는 "왜"를 잃고 "나"를 잃고 "정의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모두가 빛나는 성과를 쫓을 때 우리의 것을 지키고 만들어 내려는 창의적 시도가 꾸준히 유지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BTS가, 기생충, 오징어 게임이,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눈 떠보니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변화하는 시대환경 속에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빨리 대응하여 왔다.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막론하고 'K-ㅇㅇ'이 인기 인걸 보면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많은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앞으로 선진국의 국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난 이 태도의 답을 이 책에서 조금은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빛나는 성과를 위해서 등한시했던 것들을 돌아보며, 아직 현존하고 있는 다양한 구조적인 문제들을 들여다보고 이를 해결에 집중하기보단 먼저 정의하고 그 정의의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그 안에서 나를 찾고 우리를 찾는 태도, 그리고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나 또는 우리의 것이 있고 그것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자세. 이게 별거 아니어도 멋있어 보이는, 내가 예전에 선진국들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그들의 여유이다. 최근에 열리는 베이징 올림픽을 보면서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금메달이 아니면 비난하고 엄청 아쉬워하고 분노하던 나 자신이 포디엄에 못 올라가더라도 끝까지 본인과 국가를 대표해서 플레이하는 선수들을 더 응원하고 지켜보는 나를 발견했고, 나와 비슷하게 응원하는 댓글이나 주변의 반응을 볼 때 '아... 정말 이렇게 우리도 선진 국민이 되어가는구나'라고 느꼈다. 하지만 불합리한 판정으로 일관되었던 쇼트트랙 앞에서는 나도 딸과 같이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올림픽이 끝나면 바야흐로 정치의 시간이 온다. 대선이다. 우리는 어떤 리더와 함께 선진국으로서 앞으로의 변화를 맞이해야 할까? 나는 나 그리고 우리 가족, 더 특별하게는 선진 국민으로 태어나는 나의 둘째를 위해서 나는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답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그 후보는 무엇보다 앞으로의 시대정신이 명확하고 선진화되어 있으며 정치에 대한 태도가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이 후보를 비호감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난 공적 영역의 정치인이 품격과 정치적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고 본인의 정치 행위에 올바르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과감하고 책임 있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혹시 아직도 비호감이라 느끼는 분들께는 꼭 경기도 계곡 점령 불법영업 주민협의 영상을 추천해드리고 싶다.
https://youtu.be/MuxZUHZ97yw
오피스도 하나의 작은 사회라고 규정할 때 우리는 크고 작은 리더들을 대한다. 물론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된 권력은 아니지만 한 개인의 오피스 생활자로서 리더들을 개인적으로 평가하고 자신도 리더가 되기를 꿈꾼다. 소시민으로서의 오피스 생활자들을 바라볼 때 그들은 항상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정보공개를 원하며, 자신의 동기부여와 기회 제공에 대한 권력의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이 굴복당하고 패배할 때 저항을 선택하기보다는 안주를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되어 버린 생활자들은 무난하고 인간적인 리더들을 선호한다. 내 안주의 오피스 생활에 따뜻한 말 한마디 정도만 보태주는 리더면 충분하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들은 결코 안주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회피하기도 하며 때로는 저항한다.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예전에 획일화된 오피스 생활을 강요당했던 것과는 달리 다양한 오피스 생활을 인정하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지금의 시대정신과 맞지 않은 리더들이 있다.
-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전의 사고방식으로 본인의 의사결정을 하는 리더
- 본인의 의견과 태도를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최소화하려는 리더
- 팀원의 비전이나 동기부여에 공감하지 못하고 본인의 성공에만 관심 있는 리더
- 빛나는 성과에 집착하고 작은 실패를 두려워하여 실무자의 업무를 신뢰하지 못하고 모든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 리더
어떤 것이 올바르고 어떤 것이 그르고는 결과적으로 논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자신의 생활과 삶의 태도를 바라보고 그것도 동일시되는 후보를 찾아 적극적으로 투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행위도 이러한 삶의 태도에 기반한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정신에는 인자하고 품격과 품위를 갖춘 어른형 리더보다 자신의 권한을 정확히 이해하고 남용하지 않으며, 공공의 영역에 자신의 의견을 자신 있게 피력하여 합의를 이끌어내는 실행형 리더가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앞으로 선진국 국민으로서 이러한 삶의 태도로 취하려 한다.
난 이재명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