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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조제 Oct 06. 2020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닮으면 잘 산다더라

시댁만 가면 잠이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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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추석은 남편과 아내가 법적으로 가족이 된 후 함께 맞는 첫 명절이었다. 양가 친척 어른들께 정식으로 얼굴도 보이고 인사도 드리는 게 마땅하지만 지속되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되는지라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부부는 서울과 경기에 있는 부모님 댁에만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정리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부부는 점심 즈음까지 남편 부모님 댁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미리 드린 연락에서 남편의 어머니께선 명절 음식 채비를 해놓을 테니 도착하면 같이 음식을 하자 말씀하셨다. 그런데 막상 부부가 오후 한 시쯤 남편 본가에 도착해보니 남편의 부모님께선 거실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이미 꽤 많은 양의 전을 모두 부쳐가고 계셨다.


ㅡ저희 오면 같이 하시지 왜 벌써 다 하셨어요!

ㅡ준비를 다 했는데 너희가 안 와서~ 시작해서 조금씩 하다 보니 다했네. 와서 간 좀 봐라.


  남편의 아버지께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장인의 표정으로 소고기 육전의 남은 찌끄레기를 한 데 모아 계란물에 부치고 계셨다. 분주한 남편의 부모님 사이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서성이던 부부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해 수북이 쌓인 녹두전이며 육전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남편의 어머니께서 전을 뒤집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부엌을 향하며 다시 말씀하셨다.

ㅡ간 좀 봐~

남편은 이내 노릇노릇 구워진 소고기 육전 하나를 집어 들고 가위로 잘라 아내에게 건넸다.

ㅡ와! 진짜 맛있네요!


  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결혼을 하신, 지금은 장로님과 권사님이 된 남편의 부모님은 결혼 후 사십 년이 가깝도록 매일 새벽 기도에 나가신다. 몸에 밴 기상 시간이 새벽 다섯 시인 분들이니 오후 한 시에 가까워오는 시간은 음식 준비를 세 번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첫 명절부터 시부모님께 명절 음식 준비를 모두 맡긴 셈이 된 아내는 당황스러웠지만 ‘앞으로 음식 할 일은 많다~’라는 아버님의 말씀에 위안 아닌 위안을 얻고 점심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래 봤자 접이식 식탁 두 개를 펴고 수저를 놓고,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만든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는 게 고작이었다.


  부부는 각종 전과 양념 게장, 숙주 고기 볶음 등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이 가득한 점심상을 맛있게 비웠다. 후식으론 남편의 어머니께서 밤을 새워가며 직접 담근 노란 단호박 식혜까지 호로록 해치웠다. 남편 부모님의 부지런함 덕분에 명절 준비는 시작도 못해보고 끝이 난 부부는 자연스레 거실에 앉아 티브이를 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이 채널 저 채널 돌려가며 티브이를 보다 보니 아내는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원래 시댁만 가면 자신의 양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먹는 아내인데 오늘은 한껏 차려진 명절 음식에 욕심까지 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를 알아챈 남편의 어머니께서는 피곤하면 방에 들어가 한숨 자라고 말씀하셨고, 곧 남편은 아내의 이부자리를 봐줬다. 그렇게 결혼 전 남편이 쓰던 작은 방에서 세 시간 정도 꿀 같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내는 저녁으로 어머니께서 해주신 비빔국수를 맛있게 한 그릇 비웠다. 추석 전날의 일이다.




  추석 당일 아침, 남편의 부모님과 부부는 네 명이 모여 앉아 추석 명절 가족 예배를 드렸다. 오랜 시간 교회 성가대로 섬기고 계시는 남편의 부모님은 찬송 중 자연스레 알토와 테너로 파트를 나눠 부르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4부 합창이 된 찬송의 소프라노를 담당하던 아내는 얼추 맞는 화음이 재미있었다. 찬송이 끝나자 남편의 아버지께선 이제 4부 합창을 해도 되겠다고 하셨고, 아내는 점점 남편의 가족 구성원이 되어가는 것을 실감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남편의 여동생 부부가 외조카와 함께 도착했다. 남편의 아버지와 부부는 집 앞 주차장까지 미리 내려가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외조카를 의전했다. 할아버지 품에 안기기도 전 외조카를 빼앗아 품에 안고 집으로 올라온 아내는 그리도 해보고 싶던 외조카 과자 먹이기를 하느라 신이 났다. 어느덧 위아래로 난 쌀알 같은 이로 쌀과자를 오물거리는 햄토리 같은 외조카의 모습이 아내는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그렇게 놀기도 잠시, 분 단위로 시계를 봐가며 외조카가 오기만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아내의 달뜬 마음도 모르고 외조카는 잠을 잘 못 잤는지 평소 같지 않게 칭얼대다 이내 잠이 들었다. 아내가 자던 그 방에서 곤히 잠든 외조카와의 아쉬운 만남을 뒤로한 채 부부는 경기도에 있는 아내의 본가로 향했다.




ㅡ얘 가서 잘했니?

  주방일이라곤 거의 할 줄 모르는 철부지 딸이 첫 명절, 시댁에서 어찌 사람 구실은 했을지 궁금했던 아내의 어머니가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지 아니면 벌써 나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내는 어머님과 아버님 옆에 두둑이 쌓여가던 각종 전들이 떠올라 잠자코 눈치를 보고 있는데, 뒤에서 남편이 구원자처럼 거들고 나섰다.


ㅡ00이 엄~청 잘했죠~

순간 아내 가족들의 이목이 쏠렸다.


ㅡ잘~먹고, 낮잠도 잘~ 자고~ 자고 일어나서 저녁도 잘~ 먹고요.


  남편은 구원자가 아니었다. 처가에서 재밌는 사위이고픈 남편은 아내를 팔고서라도 웃음을 선택했다. 아내는 무언가 억울했지만 남편이 한 말 중 거짓인 말은 하나도 없었다. 아내는 잘~ 먹었고 낮잠도 잘~잤고 또 일어나서 잘~ 먹었다. 아내의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빵 터졌다. 아내는 엄마와 외할머니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끼며 선제 방어를 시도했다.


ㅡ아니~ 어머님이 먼저 들어가서 자라고 하시잖아.

ㅡ들어가서 자란다고 자냐 으이구. 00(남편)아 너도 저기 방에 들어가서 한숨 자라~


아내 어머니의 예상치 못한 드립에 온 가족이 다시 한번 빵 터졌다.




  며칠 뒤 남편의 부모님과 여동생 부부가 부부의 집에 방문했다. 며칠 내내 기름진 명절 음식을 먹어서인지 매콤한 게 당기셨다며 함께 먹자고 아귀찜을 주문해 오신 것이다. 좁은 식탁에 모여 앉아 매콤한 아귀찜과 볶음밥을 맛있게 먹곤 온 식구가 기다랗고 좁은 거실에 모여 앉았다. 뭐 마실 것 좀 드리냐는 아내의 물음에 남편의 아버지께선 커피는 없나요?라고 물으셨고, 며칠 전 커피 캡슐이 바닥난 게 생각난 아내는 부엌 서랍 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여기저기서 하나 둘 모아놓은 인스턴트커피가 몇 있었다. 아내는 남편의 부모님과 남편 여동생 부부로부터 총 네 잔의 커피를 주문받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캡슐 커피만 마시다 종류도 각기 다른 인스턴트커피로 커피를 타려니 물의 양이 감이 오질 않았던 아내는 계량컵을 꺼내 들었다. 인스턴트커피 봉투에 적힌 150ml를 맞추기 위해 아내가 다 끓은 포트의 물을 계량컵으로 옮기는데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남편이 불쑥 말했다.


ㅡ지금 계량컵 쓰는 거야? 얼마나 맛있게 하려고~ 무슨 과학 실험실인가요?

  남편의 갑작스런 깐죽거림에 아내는 당황함과 동시에 이렇게까지 했는데 커피가 맛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무려 계량컵으로 제조한 커피를 받아 들은 남편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커피가 맛있다는 말을 족히 스무 번은 더했다. 커피맛을 걱정하는 아내를 의식한 행동임에 분명했다. 남편의 깐죽거림에 잔뜩 약이 오른 아내는 문득 남편의 추석 만행을 일러바칠 기회다 싶어 시부모님께 말을 꺼냈다.


ㅡ어머님, 아버님~ 남편이 저희 엄마께 제가 시댁에서 잘~했다고, 잘~먹고 낮잠도 잘~ 자고, 자고 일어나서 또 잘~ 먹었다고 얘기했어요. 자기가 웃기고 싶다고 저를...


이번엔 남편의 부모님이 빵 터졌다. 그리곤 남편의 어머님께서 말을 이었다.


ㅡ나도 예전엔 시댁만 가면 그렇게 잠이 오더라~ 그래서 점심 먹고는 방에 들어가서 낮잠 많이 잤어. 왜 이리 시댁만 가면 졸리던지.

ㅡ어머님~ 제가 어머님을 닮았나 봐요.

아내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중에 아내의 어머니께 들으니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닮으면 잘 산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요상한 말의 출처 따위는 관심도 없이 시댁에만 가면 졸음이 쏟아지는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아내가 시댁만 가면 어린이집 낮잠 시간인 마냥 잠을 자는 이유는 다 잘 살려고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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