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16. 걷기
나의 걷기 역사의 시작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 집에서 학교를 가려면 버스로 15분 정도 걸렸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는데, 문제는 그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만 다닌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끝난 뒤 버스 시간이 잘 맞으면 15분 만에 집에 갈 수 있지만 아슬아슬하게 버스를 놓치는 날에는 1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차라리 걷는 게 집에 더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다만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차도뿐이라 조금 위험했는데 당시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은 차도 사람도 별로 안 다니는 시골길이라 겁이 안나기도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걸어가다 다리 아프면 지나가는 차를 세워 어디 어디 가는데 좀 태워주세요~ 하던 게 아무렇지 않은 시절이기도 했으니 겁도 없이 한 시간 거리를 걸어 집에 가곤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몇 걸음 가다 보면 동네 강아지들이 달려 나와 어디 가냐고오! 왜 그냥 가냐고오! 짖어댄다. 강아지들과 좀 놀다가 발걸음을 옮기면 옆에는 개천이 흐르고 건너에는 농사를 짓고 계신 어르신들이 보이고 반대편 공장 안쪽으로는 일하는 분들의 모습이 슬쩍 보인다.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면 한 시간 길도 지루할 틈이 없다.
때로는 곧 버스가 올 시간이어도 집에 걸어갔다. 당시 차비가 3백 원(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5백 원까진 안되었던 것 같다) 정도였는데, 그 돈이면 문방구에서 불량식품 3개 혹은 슈퍼에서 과자나 아이스크림 1개를 사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한 시간 걷고 과자 한 봉지면 썩 남는 장사는 아닌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꿀맛이었다. 꿀꽈배기 하나 사서 입에 물고 집에 걸어가자면 가는 길이 그리 달콤할 수 없었다.
차비와 바꿔먹는 간식은 너무 달콤해서 나는 곧 상습범이 되었다.
한 번은 시내에 동생과 놀러 갔다가 돈은 다 썼는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동생을 꼬셔 차비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집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다. 버스로 갈 때는 순식간이었던 것 같은데 알고 보니 그 길은 걸어서 2시간은 족히 되는 거리였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호기롭게 출발할 때는 좋았지만,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자 동생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못 걷겠다며 주저앉는 동생 옆에 나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갈길은 멀고 집에는 가야겠지. 어쩌겠는가. 동생을 업고(라고 쓰고 등에 붙여 질질 끌고 간다고 읽는다) 집에 와서는 엄마에게 시원하게 혼났다. 당시에는 동생을 이고 지고 힘들게 왔는데 날 왜 혼내나 속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인도 하나 없이 차가 씽씽 달리는 길을 꼬맹이 둘이 2시간 동안 걸어왔다고 하니 엄마가 얼마나 놀라셨을까 싶기도 하다.
그때부터 한두 시간 거리는 걸어 다니기 시작했던 것 같다.
걷는 내내 나를 둘러싼 풍경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 신이 난다.
혼자서 걷는 것도 좋지만 둘이 걷는 것도 좋다.
아직은 어색한 사람과 걷는 건 이야깃거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 걸으면서 보이는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로 나오니 굳이 머리를 짜내지 않아도 대화가 술술 이어진다.
편안한 사람과 걷는 건 당연히 더 좋다. 눈 앞에 보이고 코로 맡아지는 것들, 귀로 들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경계 없이 이야기하다 보면 그 사람이 더 좋아진다.
때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있을 땐 무작정 신발끈을 동여매고 집 밖으로 나온다.
정처 없이 이 골목 저 골목을 오가며 떠오르는 생각을 중얼중얼 되뇌기도 하고 멍하니 하늘도 봤다 땅도 봤다 하면 어느샌가 머릿속 서랍에 생각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가는 걸 느낀다.
어느덧 여름, 한낮에는 몇 걸음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른다.
하지만 여름 걷기의 묘미는 여름밤에 있지.
늦은 밤까지 웅성웅성 편의점 앞 파라솔에서 들리는 잔을 부딪히는 소리, 낮 동안 데워졌던 바람이 살짝 식어가며 부는 살랑한 바람, 나뭇잎 사이로 들리는 매미와 풀벌레 소리.
걷자, 집 앞이야!
* 이 글의 제목은 '스무살'의 노래 제목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