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2. 향수
향수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여자의 패션은 향기로 완성된다'를 비롯하여 향기를 꾸밈의 화룡점정으로 칭하는 말들이 많지만, 오랜 기간 향수는 나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패션잡화였다.
예전에 만나던 친구 중에 종종 향수를 선물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업무 특성 상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해서였는지, 언제부터인가 향수를 꼭 썼는데 나에게도 어울릴 것 같다며 이런 저런 향수를 선물해 주곤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처음 그에게 선물 받은 향수는 페레가모의 세뇨리나 엘레간자였다.
꽤나 묵직한 향이었다. 높은 구두를 신고 몸에 잘 맞는 정장을 입은 커리어 우먼이 뿌릴 것 같은 향.
마음은 고마웠지만 나에게는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고, 무엇보다 뿌리면 향이 너무 진해 내 머리가 아픈듯해 몇번 사용하지 못했다.
그 친구도 처음에 몇번은 '그 향수 왜 안써?'라고 묻더니, 이내 나의 숨은 마음을 알았는지 더 이상 그 향수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선물받은 향수는 에르메스 운 자르뎅 수르뚜와 우먼 이었다.
이 향수를 사용하면서 비로소 나는 왜 향수를 사용하는지 알게 되었다.
상큼하면서도 청량한 향기가 정말이지 여름에 잘 어울리는 향수였는데, 기분이 약간 울적할 때 이 향수를 뿌리면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향수병은 얼마나 또 상큼한지. 향수를 뿌린 다는 것은 몸에서 좋은 향이 나는 기쁨 뿐 아니라, 향수병을 들고 바라보며 칙칙 뿌리는 행위만으로도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향수를 선물 받은 후로는 나는 여름 내내 이 향수만 사용했고, 그에게도 너무 마음에 든다며 몇번이나 좋다고 표현을 했었다. 그도 본인이 고른 향수에 만족해 하는 나를 보며 꽤나 흡족해 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으로 선물받은 향수는 구찌 플로라 만다린이었다.
이 향수를 선물받고 처음 든 생각은 '아 이 사람이 나를 정말 잘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적당히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좋았던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어느 곳에서나 어울렸다. 여러 향수를 TPO에 맞게 쓰지 못하는 나에게 하나의 향수가 어느 곳에서나 통용된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탑 노트 부터 잔향까지 튀는 향 없이 오래 지속되는 덕에 아침 출근길에 뿌리고 나온 향기가 퇴근길까지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느낌이 좋았다.
그는 향수를 맘에 쏙 들어하는 날 보며 '내가 이정도야'라고 기분 좋게 으쓱해 했고, 나는 그가 으쓱해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했다.
그와 향수에 얽힌 추억은 여기까지이다.
헤어지고 난 후 난 그가 준 향수 중 하나를 동생에게 선물했고, 두개는 서랍 깊숙히에 넣어놨었다.
사실 오래만난 덕에 그에게 받은 선물이 참 많아서 모든 물건들을 처리하진 못했고, 솔직히 말하면 헤어진 직후에도 마음은 아프지만 마땅한 대용품이 없어서 몇가지 물품들은 잘 들고 다녔었다.
그런데 향수는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정말 후각이라는 감각은 기억하고 붙어있기라도 한건지, 향기를 맡을 때 마다 떠오르는 그 친구에 대한 생각이 나를 아프게 했기에, 향수는 처분할 수도 사용할 수 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서랍 깊숙히 넣어둔 향수도, 이미 꽤 시간이 지난 그와의 이별도 기억에서 희미해졌을 때쯤.
퇴근길 에스컬레이터에서 그가 쓰던 향수 냄새가 났다.
사실 향기를 맡자마자 바로 기억해냈다. 그는 지금 한국에 없다.
그런데도 눈은 계속 그를 찾았다. 그를 만나도 특별히 할말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도 몰랐는데 눈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움이 나를 덮쳤다.
폭풍 같던 마음이 한참이나 나를 헤집어 놓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한 걸음 더 그와 이별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향기란 이런 거구나. 이렇게나 큰 힘을 가지고 있구나.
오랜만에 그가 준 향수를 서랍에서 꺼냈다. 내 손에 잡힌 것은 플로라 만다린.
한 두번 손목에 향수를 뿌리자 여전히 달콤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그 날 부터 다시 향수를 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