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충격적인 이유
※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신작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이번에 보게 된 작품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독립 영화계에서 몇 해 간 광폭 행보를 보이는 A24의 제작으로 저의 눈길을 사로잡은 바 있습니다. 또 최근 이동진 평론가의 5점 별점으로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특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만행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예고편에서 보인 바와 같이 영화는 시종 눈을 떼기 어려운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관객을 몰입하게 만듭니다. 동시에 삽입되는 사운드트랙은 공포 영화의 그것처럼 기괴한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리 애스터 감독의 <미드소마>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다음으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안티크라이스트>가 이유 없이 떠올랐습니다.
언뜻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처럼 보입니다. 심미적인 숏과 예술적인 연출, 갑자기 뛰어넘는 시간선, 비명과 떠드는 군중의 목소리가 뒤섞인 사운드트랙. 이 모든 것들이 영화를 다소 난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직설적입니다. 많은 분들이 느낀 바와 같이 나치 부역자들의 역겨움을 조명합니다. 감독은 영화가 곡해될까, 시대극에서 고의로 시간선을 뛰어넘어 현실로 이동해 비추고자 하는 곳을 확실히 합니다.
영화의 엔딩에서 '루돌프 회스'는 계단을 내려가다 별안간 구역질합니다. 층을 내려가며 구역질하던 그는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데 거기엔 아주 좁은 구멍이 있습니다. 구멍은 시간상으로 미래를 엿보는 좁은 깔때기처럼 보입니다. 곧 이은 장면에서 우리는 현대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쓸고 닦는 관리인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깔때기는 다시 우리가 루돌프를 포함한 나치 독일 부역자들이 존재했던 과거를 보게 되는 좁은 틈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거기서 결말을 맺습니다. 결말은 아주 건조하며, 이어져 나오는 비명 같은 소리가 상승하며 반복되는 사운드트랙은 관객에게 조소를 던지는 듯합니다.
영화가 조명하는 이야기에는 관객이 원하는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를 해부해 보면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는 평화, 위기, 회복이라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의 왕과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루돌프는 성실한 일꾼이자 아버지로 묘사되며 헤트비히는 성실한 가정의 어머니로 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교훈에서 얻은 바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나치 독일 부역자와 그 동조자들이 악마가 아닌 성실한 인간(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잃은)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일부 동일한 주제 의식을 갖습니다.
이 가정의 모습은 다소 낭만적으로 그려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헤트비히는 3년 전 아무것도 없었던 수용소 앞의 사택을 정원, 수영장이 딸린 낭만이 있는 집으로 일궜습니다.
그녀의 관심은 자신의 가정을 지키는 데 쏠려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도 남기지 않고 절멸하는 것에 열중함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루돌프가 전출을 가게 되자 헤트비히는 정착지를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입장에서 아우슈비츠는 독일을 떠나와 먼 타국에서 일궈낸 소중한 가족들의 보금자리입니다.
루돌프는 끝내 전출을 가게 되고 잠시 멀어집니다. 하지만 루돌프의 능력을 상부에 인정받음으로써 가족은 재결합을 앞두게 됩니다.
루돌프는 늦은 밤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회스' 작전이 수행될 것이며 자신이 다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지금 그걸 말하려고 전화했냐"고 말하고 무뚝둑하게 말합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어디를 향하는지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한편, 루돌프는 파티에 누가 왔냐는 아내의 질문에 "어떻게 사람들을 가스실에서 죽일지 고민하느라 몰랐다"고 답합니다. 다시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말해줍니다.
영화의 제목이 왜 <The Zone of Interest>인지를 명백히 알려줍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사택 넘어 수용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카메라에 담지 않습니다. 관객은 희미한 비명과 기차 증기 같은 것들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짐작만 할 뿐 입니다. 심지어는 루돌프의 눈앞에서 어떠한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유추되는 장면에서도 의도적으로 배제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나 감독이 폭력적인 시선을 거둔 것이 아니라 그들(가해자)이 피해자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기 때문을 알 수 있습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신경쓰지 않은 덕에 (영화가 가진 충격과 별개로) 12세 관람가로 개봉할 수 있었습니다.
늦은 밤 한 소녀가 눈을 피해 수용소 주변에 사과와 같은 과일을 숨겨 둡니다. 아우슈비츠의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추측되는데요. 그 모습을 보는 방식은 꽤 특별합니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해당 장면은 "체온으로만 볼 수 있는 선(善)"입니다.
열화상 카메라로 담은 것처럼 연출된 장면들은 가스실에서 사망한 이후 소각장에서 재가 된 피해자들을 위로합니다. 차갑게 식고 재가 되어 유품만 남은 그들이 가졌던 온기를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적인 표현 방식으로 풀어냈습니다.
해당 장면은 관객만 볼 수 있는 시선입니다. 그러한 연출은 엔딩에서 아우슈비츠 박물관 전경으로 닿습니다. 실제 전경을 담은 것으로 유추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열화상 카메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정돈된 장면들로 시선을 빼앗습니다. 이는 감독의 의도적인 도발이며 함정입니다. 관객은 결론에 다가가서 영화가 던지는 무거운 메시지를 체감하게 되는 순간, 그러한 장면들에서 어떠한 심미적인 흥분을 느낀 스스로에게 구토감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저는 영화를 두고 "특별하다", "흥미롭다", "재미있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홀로코스트 사건을 다루는 주제 의식, 인간의 시선과 청각을 다루며, 영화적인 연출을 극대화한 감독의 아이디어를 두고 창발적이라며 감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이러한 경험을 의도한 연출법에 감탄하는 스스로를 보게 됐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관객은 루돌프와 같이 구토감을 얻지만, 결국 아무것도 게워 내지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좁은 깔때기의 틈으로 시선이 옮겨갈 듯하지만, 이내 그 시선은 거둬지며 결국 스스로가 가지는 '흥미'를 향합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고 난 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감정이 드는 것은 그들과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우슈비츠 박물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밖에 수많은 역사적 비극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토감이 느껴질 때가 돼서야 시선을 던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