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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훈 May 23. 2022

영화 패왕별희 선택적 리뷰, 해석

이 리뷰는 개인적 소감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수정되거나 파기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패왕별희는 강렬한 집단주의의 광풍 속에 홀로 설 수 없는 한 개인이 어떻게 고통받고 파괴되어 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국 인민들의 역사 속에 천자(天子), 군벌, 공산당 주석 등 권력자에게 몰려 있던 시선을 힘없고 나약한 개인으로 옮겨 왔다는데서 논쟁적이며 그 방식을 기존 경극 패왕별희의 이야기를 영화에 이식했다는 점에서 그 예술적 성취도 상당히 높다.



*패왕별희와 중국

 패왕별희의 모티브인 항우와 우희의 로맨스는 사실 항우(영웅) 중심의 서사일 뿐이다. 우희는 그저 자신이 항우에게 걸림돌이 될까 두려워 항우의 칼로 자살했을 뿐이다. 항우는 우희의 자살 이후에도 살아서 몇 차례 도망을 다니다 결국 자신이 그토록 자랑하던 기력이 다하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두 인물이 각기 지닌 정체성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데 항우에게는 힘 그러니까 권력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주되며 우희에게는 항우라는 패왕에 대한 사랑이 가장 주가 된다. 두 사람은 연인관계이면서 주종관계였고 우희는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자기 삶을 마감한 것이다. 우희는 한 개인으로써 존재하지 못하고 초패왕 항우의 부속에 가까웠다. 항우와 우희의 이야기는 초한지의 서사 중 짤막한 토막에 지나지 않음에도 패왕별희를 통해 뇌리에 남는 대목이 되었다. 영화 패왕별희가 기존 영웅 중심의 서사인 초한지에서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우희를 중심부로 불러왔기 때문이다. 패왕별희는 중국 인민들의 저변에 깔린 중화사상 속 집단주의, 전체주의 세계관에서 나약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동시에 인민들 자신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에게도 중국 문화 중 더 익숙한 작품들은 초한지와 삼국지 같은 영웅 중심 서사류다. 중국 대륙이 세계의 중심이란 중화사상은 당연히 모든 권력의 시선이 황제에게 쏠리도록 만들었다. 중국 대륙에 황제의 자리는 빈 적이 없고 각 성에는 늘 봉건 군벌들이 제각기 자기 세력을 과시했으며 하층민들을 착취했다. 루쉰은 중국 문화가 다수의 불행을 대가로 삼아 승리를 거둔 주인에게 봉사하는 문화라고 지적했다. 청 왕조 멸망 즈음 태동했던 중국의 문학들은 패왕별희처럼 영웅, 천자, 황제 중심에서 개인, 농민, 인민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활발히 태동했고 이로 인해 많은 개혁과 발전에 성공했다. 잠시나마 권력의 시선이 인민으로 옮겨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이후 결과는 우리가 뻔히 알듯 또 다른 황제의 탄생이었다. 중국인들의 집단주의, 전체주의를 향한 강박은 사실 이해하기가 어렵다. 1세기 이전의 세계는 그런 것들이 당연하듯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변했다. 탈중앙화와 개인 중심적 사회 분위기로의 변화는 이제 당연하다. 이렇게 되면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왜 중국인들은 거대 권력의 탄생을 용인하는가? 패왕별희를 보고 있자면 한때 중국 내부에서도 그에 대해 스스로 질문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패왕별희 개봉 30여 년 뒤 첸 카이거 감독은 중국 공산당 자본으로 중국 공산당 선전 영화 <장진호>를 만들었다.

 

*청데이와 경극의 관계

 데이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기만 해야 한다. 손가락을 잘리고 성 정체성을 강요당하며 성적 학대를 당하고 단샬루가 주샨에게 가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 그의 샬루에 대한 애정은 특별하다. 그의 삶 속에서 확실한 정체성이라고 할 것은 경극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당연히 그는 경극에 계속해서 집착할 수밖에 없다. 자기 삶 속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경험뿐인 그에게 경극은 자기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이자 자신이 가진 유일하고 확실한 정체성이다. 이런 모습은 마치 그 당시 내외적으로 혼란스러워하던 중국 인민들에 대한 비유 같아 보인다. 경극이란 전통 예술은 마치 우리가 창극과 마당극, 사물놀이를 우리의 얼이라고 부르고 한국인의 정체성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 당시 혼란스러운 시기의 중국 대중들에게 정체성이 되어줄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녹아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영웅 중심의 서사는 그들의 죽어가는 정신을 깨워주기도 했을 것이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술체인 경극은 대중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잠시나마 잊게 했을 것이다. 데이에게 그런 경극은 분명 자기 삶의 불꽃이자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데이가 공산당원들 앞에서도 여전히 과거의 경극 방식에 집착하고 샤오쓰(경극학교 앞에 버려진 아이로 데이가 거뒀으나 후에 홍위병이 되는 인물)를 이전처럼 폭력으로 훈계하는 것은 변하지 않을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러나 데이는 샤오쓰와 단샬루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한 뒤 경극 의상들을 모두 불태우고 포기한 듯 떠난다. 그는 후에 문혁 때 우희로 분장하고 나타나지만 이제 완전히 나약해진 초패왕과 우희는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하고 홍위병들에게 조롱당한다. 데이는 여기서 자기 정체성의 모든 걸 부정당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는 11년 뒤 샬루와 텅 빈 강당에서 경극 연습을 하다가 패왕의 칼로 자살한다. 텅 빈 강당에서의 연습은 많은 것을 설명한다. 그의 자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의 죽음이 그토록 쓸쓸해 보이는 것은 화려한 경극배우의 삶을 살다가 이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노배우가 되었단 사실일 것이다. 그처럼 경극도 나이가 들었고 더 이상 사람들을 구름처럼 이끌고 다니지 못한다. 대중예술이 아닌 전통예술, 보존해야 할 것이 됐다. 그는 이제 관중석이 텅 빈 강당에서 샬루와 연습이나 하는 처지에 머물러야 한다. 이미 문혁 때 고초를 겪으면서 자신의 모든 걸 부정당하고 파괴당했지만 왜 굳이 11년 뒤인가의 해답은 바로 데이의 정체성인 경극이 과거의 유산이 되었기 때문일 테다.



*세 명의 우희. 청데이, 주샨 그리고 샤오쓰

 영화에는 여러 명의 우미인이 등장하고 여러 명의 패왕이 등장한다. 각 인물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초패왕과 우미인의 관계가 반복적으로 투영된다. 와중에 가장 우미인과 초패왕의 관계에 딱 들어맞는 인물은 사실 데이와 샬루보단 주샨과 샬루다.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항우와 우희의 관계 속 정체성의 차이는 샬루와 주샨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주샨은 샬루를 향한 사랑이 자신의 정체성이었지만 샬루는 그녀를 지키는 자신의 힘에 더 무게를 둔 인물이었다. 문혁 때 샬루가 주샨을 부정함으로써 주샨의 정체성은 무너지게 되고 그녀는 죽음을 선택한다. 데이는 처음 샬루를 주샨에게 빼앗기자 그녀를 미워하고 천시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주샨 역시도 마찬가지로 데이와 묘한 동질감과 동료애를 느꼈던 것 같다. 홍위병들 앞에서 고초를 겪은 뒤 주샨은 말없이 넋을 잃은 데이에게 패왕의 검을 건네주고 떠난다. 그리고 직후 그녀는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그 장면에서 두 우희는 서로의 운명을 직감이라도 한 듯 보인다. 두 인물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소수자로써 가장 힘없고 나약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특히 주샨은 데이에 비하자면 인기도 권력도 없는 가장 천시당하는 매춘부였다. 그녀는 가진 것 하나 없이 극단으로 들어와 위축되지도 샬루를 빼앗기지도 않았다. 샬루가 위험에 빠졌을 때 데이를 찾아가 자존심을 굽힐지언정 자신의 사랑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순간 집단주의의 광기에 발가 벗겨져 정체성, 즉 자신을 잃고 만다.

 샤오쓰는 경극학교 앞에 버려진 아이였으나 데이가 그를 거둬들이면서 경극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 역시도 힘이 없고 나약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데이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외롭게 지내기 싫기라도 했는지 공산당원이 되어 집단주의, 전체주의의 광기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다. 데이와 주샨이 각각 경극과 사랑을 자기 정체성으로 확신했다면 샤오쓰는 공산주의 굳이 따지자면 마오쩌둥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확신한 것이다.

 문혁 당시 어린 청소년들이 홍위병에 가담하고 사회 전반에 폭력과 파괴를 일삼은 것은 문혁의 시위를 당긴 마오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안함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린 청년들의 확실한 정체성이 되어줄 공산당 강령은 그들에게 많은 위안을 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중국의 저변은 어땠는가? 지금으로썬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도덕적 우월성과 분노를 무기로 삼은 어린 청년들은 단지 중국을, 인민들을 변혁할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 정말 많은 끔찍한 일들을 자행했다. 영화 말미에 표현된 문혁에 대한 묘사는 정말 끔찍하고 불편한 당시의 실상을 마주하게 만든다. 이후 샤오쓰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문혁에 가담했던 많은 청년들이 교육의 기회를 잃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역사적 맥락을 알고 난다면 그 역시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있다. 영화에서도 언급된 문혁 당시 마오쩌둥 주변에서 주요 역할을 했던 4인방은 후에 처벌받지만 이미 망가진 인민들의 삶은 고칠 수 없었다. 주동자인 마오쩌둥은 여전히 신격화되어 있으니 결국 작중 데이의 대사처럼 우희가 먼저 희생당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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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홍콩, 중국 영화에 대한 상실감은 당시를 살지 않았던 내게도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중국의 문화 예술은 그 시절 그때에 멈춰 있는 것만 같다. 마치 장국영이 그때 그 시절 그대로 남은 것처럼.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는 패왕별희 속 장국영은 더욱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히려 지금의 중국이 있기에 패왕별희가 단순한 영화로 남지 않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려 감독의 행보와 중국 공산당의 독재 때문에 패왕별희에 대한 논쟁적인 이야기들과 예술적인 완성도는 앞으로 그 가치가 높아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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