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못 마시던 사람이 커피를 마시게 되는 일련의 순서가 있다. 먼저커피 아이스크림이나 커피 우유 같은커피맛 음료를 먹는다. 그러다 차츰 커피스러운 커피들로 넘어간다. 믹스 커피, 프라푸치노, 모카, 마끼아또, 바닐라라떼, 그냥 라떼의 순서다. 최종 목적지는 물론 아메리카노. 카페에 가서 아아 주세요, 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면 축하한다. 그대는 커피계의 인싸 만렙이다.
몇 년의 시간을 거쳐 커피맛 아이스크림에서부터 라떼까지 왔다. 이제 커피 어린이에서 커피 청소년정도의 단계까지는 온 것 같은데 라떼의 다음으로는 좀처럼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아메리카노는 쌉쌀한 뒷맛이 깔끔하다는데몇 번 시도해봐도그 깔끔한 맛이도무지 무슨 맛인지 모르겠달까.하여 내가 먹는 커피란 달달한 바닐라라떼거나 그냥 고소한 라떼거나 하는 고만고만한 수준. 딱히 커린이도 아니고 커른이도 아닌 상태로 매일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친구와 카페에서 만났던 적이 있다. 그날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친구가급히만나달라고 졸라서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누군가가 나를 조르면서까지 만나자고 하는 경우는 살면서 몇 없었기 때문에 이거 아주 대단한 사달이 났구나 싶었다.
예상대로얼이 쏙 빠진몰골로 나타난 친구는 오자마자 음료를 주문할 틈도 없이 내가 있는 자리로 휘청휘청 걸어왔다. 그리곤 만화 속의 해골처럼 움푹 패인 얼굴을 하고서 이별의 슬픔에 대해 한바탕 역설을 했다. 친구의 남자친구, 였던 남자, 와 나는 하등 상관이 없는 사이어서인지슬프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의 나쁜 모습에 슬금슬금 화가 났다.
이야기를 듣다 나도 모르게 "아니, 그 미친ㄴ..." 하고 욕을 하려는데 말이채 끝나기도 전에 친구의 얼굴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욕을 들을 때보다더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사랑이 뭔지.이런 상황에서도 그 사람 생각을 먼저 하는 모습이라니. 황급히 "아니, 그... 그 미친 상황..." 하고 말을 바꾸니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도 미친 사람이 되지 않고 무사히 미친 상황을 만들 수가 있다.
"야, 나 부탁 좀 들어줘."
"뭔데."
"내 핸드폰 사진첩에 사진 좀 지워줘."
친구가 말했다.
"도저히 못 지우겠어."
받아든 핸드폰엔 몇 년 치의 사진이 있었다. 하나같이 뺨을 맞대고 웃는 표정들. 다정함이꿀처럼 뚝뚝 묻어나는 사진들을 지우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사랑의 달콤한 첫맛과 쌉싸래한 뒷맛에 대하여. 믹스 커피에서부터 아메리카노에까지 아우르는 그 다양한 층위에 대하여.
사진을 지우는 동안 친구는 울다가 웃었고, 심지어 종이는 어디서 났는지 만남에서 이별까지의 연표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짠하여 안쓰럽다가도 가끔은 참을 수 없이 웃기기도 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은 친구도 마찬가지였는지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짓는 괴상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야, 나 식욕이 떨어진 건 난생 처음이었어."
"어, 그래보여."
"근데 살 빠지니까 그건 좀 좋더라고."
"야, 나도 헤어졌을 때 초등학교 때 몸무게로 돌아갔었잖아."
"미친..."
"완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였다니까."
"돌았네..."
"일단 뭐 좀 마셔. 너 에이드 먹을 거지?"
자리에서 일어서며친구에게 물었을 때였다. 나보다도 커알못인 친구라 늘 단 음료를 먹어서이번에도 그런음료를 시킬 줄 알았다. 친구는 휴지로 콧물을 닦으며 무심히 말했다. "아니, 나는 콜드브루."
콜드브루라니? 믹스 커피도 못 마시던 애가 발음도 고급스러운 콜드부르라니! 그 변화가 내겐 이별로의 장황한변화보다 더 놀라웠다.자리에 우뚝 선 채로그 동안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물었다.콧물 묻은 휴지를딱지 모양으로 우아하게 접던 친구가 대답했다.
"그냥그렇게 됐어."
그냥 그렇게 됐어. 이토록 깔끔한 뒷맛이 또 무엇이 있을까. 담담한 말투를 따라 속으로되뇌었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사랑.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이별. 그런 게 사랑이라면아무래도 너무 쓰지 않나.
손끝에 묻어나던어느다정을 떠올리며뒤로돌아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나에게아메리카노는 앞으로도어려운 커피일 것 같단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