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두 번째 마음,
아련하다
음식 취향에 관해서라면 아빠에겐 정해진 답이 있었다. 과자는 새우깡, 고기는 돼지갈비, 케이크는 롤케이크. 과자에 새우깡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고기에 돼지갈비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아빠는 선택지가 하나 뿐인 것처럼 늘 같은 것을 고집했다.
"아빠는 과자 중에서 뭐가 제일 좋아?" 아주 어렸을 때엔 아빠는 어떤 과자를 좋아하는지가 궁금했다. "그야 새우깡이 최고지." 그렇구나. 나는 딱딱한 새우깡보다 홈런볼이 더 좋은데. 제일 좋아하는 과자의 이름을 알면 아빠에 대해 충분하게 알게된 것 같은 기분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럼 돼지갈비는 왜 좋아?" 머리가 커진 십 대가 되고서야 그 이유를 물었다. "그야 돼지갈비가 싸고 양 많으니까 최고지."
아빠의 취향은 그랬다. 다양한 선택지 안에서 섬세하게 음미해보거나 향유해본 적 없이 그저 싸고 양이 많은 두 가지의 선택지 안에서 택해야 했던 가난한 취향. 경험으로 하나씩 체득해가며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있는 것을 따라 정했던 취향 아닌 취향들이었다.
아빠의 일관적인 입맛에 대해서는 다 그런 이유 때문일거라 다만 짐작할 뿐, 으레 묻지 않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롤케이크는 그러니까 조금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근데 롤케이크는 왜 좋아?” 롤케이크는 케이크라기엔 케이크처럼 생기지 않은 데다 다른 빵에 비해 딱히 싸거나 양이 많은 것도 아닌데 왜 제일 좋아할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지금까지의 대답이 그랬던 것처럼 '그야 옛날에는 롤케이크가 제일 저렴해서' 와 같은 말을 예상했는데 아빠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어, 그게 아빠가 전에 여자 친구 만났을 때..." 남자 친구의 전 여자 친구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빠의 전 여자 친구 이야기라니. 놀랐지만 놀란 티를 내면 아빠가 말을 하다 말까 봐 조금도 놀라지 않은 척 "아, 어, 여자 친구가 왜?" 하고 태연히 응수를 했다.
아빠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아빠가 스무 살 무렵쯤이었으려나. 아빠의 여자 친구로부터 직접 구운 케이크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사실 롤케이크는 아니었는데 카스텔라에 크림 발라놓으니까 롤케이크랑 맛이 비슷했단 말이지."
어쩌다 무심코 말했던, 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아빠의 말에 아빠의 여자 친구는 케이크 만들기를 몰래 맹연습했더랬다. 그리고 아빠의 생일이 있던 날에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만든 어설픈 케이크를 아빠에게 선물했다. 밥솥으로 만든 카스텔라 위에 생크림을 발라 모양이 제법 그럴싸했다고, 아빠는 먼 곳을 더듬는 사람처럼 눈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입가에 걸린 은근한 미소를 내려놓을 줄 몰랐다.
"눈동자가 무척 큰 사람이었는데."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아빠가 딸 앞이란 걸 뒤늦게 눈치챘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어정쩡하게 얼버무렸다. "글쎄, 이상하게 그 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더라고. 근데 옛날 얘기지, 뭐. 이제는 이름도 하나도 기억 안 나." 롤케이크를 왜 좋아하냐고 물었을 뿐인데 아빠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구태여 말을 덧붙였다.
돌돌 말린 롤케이크에 감추어져 있던 아빠의 첫사랑 이야기. 그 케이크의 맛을 아빠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의 눈동자도. 새우깡과 돼지갈비를 좋아했던 이유와는 다른 이유로 좋아했던 롤케이크는 가난한 아빠의 취향 중에서 유일하게 향유해보았던 달콤함이었으리라. 첫사랑을 떠올리는 나이 든 소년의 눈빛을 나는 그날 오래도록 엿보았다. 사랑은 달콤한 케이크의 기억처럼 시간이 지나도 달콤한 것이라는 사실을 설핏 깨달은 날이었다.
한 연인이 두 사람이 되어 멀리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케이크를 굽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녀도 아직 그 맛을 기억하고 있을까. 언젠가 길을 지나다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나면, 눈동자가 무척 큰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다가가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나의 아빠에게 달콤한 케이크를 선물해주어서 고마워요. 그 마음에 잊히지 않는 눈동자가 되어주어서 고마워요.
* 매일의 감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