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왼쪽 어깨에는 기다란 흉터가 있다. 벌써몇 년 전의 일이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어깨가 부러졌다. 금이 가거나 살짝 부러졌으면 깁스를 했을 텐데 두 동강이 나며 뼈가 'T' 자로 어긋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뼈를 붙이기 위해 부러진 어깨뼈에 금속판을 대고 나사를 박아 고정했다. 수술 후에도 통증이 심해 입원한 2주 동안은 자리에 눕지 못하고 앉은 채로 꾸벅꾸벅 선잠을 자야 했다.
그전에 크게 다쳐본 적이 없었던 나는 수술도 처음이고 입원도 처음인 초보 환자였다. 하루 아침에 환자가 되고 나니 거동 하나 하기도 어찌나 힘들던지. 이 모든 게 한 번 넘어진 걸로 벌어진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은가, 원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것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2주를 버텼는데, 퇴원하고 나니 그보다 더 긴3개월의 반신 깁스가 뒤따랐다. 잘 때도 물론 하고 있어야 해서 3개월은 차렷 자세로 자야 했다. (일반 팔 깁스가 아니라 반신 깁스라 그 상태로 학교를 다녔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이지 끔찍하다.) '진짜 이것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수술 부위의 이유 모를 불편감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금 남아있다.
그래도 이제는 뼈도 잘 붙었고 깁스도 하지 않고 있으니 전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더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 말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걱정을 내비친다. "그런데 흉터가 남아서 어떡해?", "그럼 이제 민소매는 못 입겠다" 마음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리 내어 반박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부러진 뼈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지는데 반해 흉터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흉터 때문에 민소매를 입지 못하게 됐다는 걱정이 단순히 남의 일처럼 넘길 말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흉터를 내보이는 일이 부끄러움을 넘어 창피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가릴 수도 있는 걸 굳이 보여줄 것 까지야. 세상에 옷이 민소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반팔 입으면 되지 뭐. 한 뼘 길이의 흉터를 보고 있느니 옷으로 가리고 다니는 게 스스로도 속이 편했다.
며칠 전에 엄마와 차를 타고 근교로 나갈 일이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엄마의 팔을 무심코 보다 팔뚝에 있는 흉터를발견했다. 삐뚤빼뚤 꿰맨 흔적이 남은흉터. 맞다, 엄마도 팔에 수술을 받았었지. "엄마, 엄마는 흉터 안 가리고 다녀도 괜찮아?" 엄마는 괜찮냐, 고 묻긴 했지만 실은 다른 사람들이 괜찮아 하더냐는 뜻의 물음이었다.
"그럼, 뭐든 꽁꽁 감추면 부끄러운 게 되는 거고 내놓으면 안 부끄러운 게 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엄마의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그래도 그건 엄마혼자만의 생각이지 않을까? 나는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한 번씩 쳐다보던데. 심지어 징그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 하소연에다시 엄마가 말했다. "그럼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이 창피하게 생각하는 게 뭐 대수라고. 내가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음 되는 거야."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똑같은 흉터를 가지고 있는 나까지도 엄마에게 흉터를 가려야 하는 이유를 설파하려 하고 있었다니. 흉터는 창피한 것이라내게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나 자신이었다.
흉터는 흉하다는 뜻의 한자 '凶' 에 자국을 뜻하는 '터' 가 붙은 말이다. 의미 그대로 흉한 자국이란 뜻이다. 흉하고 징그러워서 가려야 하는 자국.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흉터를 꼭 창피하게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걸음마를 막 배우던 때에는 넘어지는 게 하루의 일과였다. 매일 무릎이 쓸리고 손바닥이 까졌다.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면 할머니는 옷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주며 말씀하셨다. "괜찮다. 다 넘어지면서 크는 기라." 그때에 이해하지 못했던 '넘어지는 것'과 '크는 것'의 관계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흉터는 부끄럽고 창피한 흔적이 아니라 그럼에도의 흔적이다. 넘어져 다치고 부러졌을지라도 이렇게 잘 아물었다는 흔적. 그럼에도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났다는 흔적. 세상에 넘어지지 않고 큰 아이는 없듯,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그것이 비단 몸의 흉터 뿐일까. 예기치 않은 삶의 풍랑에 생긴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이다. 넘어져본 아이만이 일어나는 법을 배우고, 다친 사람만이 낫는 법을 배운다. 흉터는 창피하고 흉한 흔적이 아니라 나에게 남은 나이테였다.
넘어지기만 하고 클 줄은 몰랐던 내게 할머니의 말씀이긴 시간을 넘어 들려온다. 퇴색된 기억 저편에서부터 귀가 아닌 가슴으로. 이제는 나의 흉터를 보며, 혹은 누군가의 흉터를 보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 보세요. 이 흉터에 대한 엄청난 이야기가 있는데요." 흉터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놀랄 만한 역사 하나씩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조금도 흉하지 않다고. 조금도 창피하지 않다고. 우리의 무릎에 남은 나이테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