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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감

와즈디 무아와드, 『화염』

by 김감감무

“만일 그대가 이자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면, 알아두소서, 그대는 불운하게 태어났사옵니다.”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1.

『화염』은 분명 오이디푸스를 모티브로 한 희곡이다. 그러나 니하드와 오이디푸스는 태생부터 다르다. 니하드는 사랑에서 태어났고 사랑받는 아이라는 점이 그렇다. 사랑의 결실이지만 민족의 분열에서 생긴 갈등 때문에 나자마자 어머니와 생이별할 수밖에 없던 니하드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버려진 오이디푸스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2.

버려지는 것과 갈라지는 것은 다르다. 버려지는 것은 버리는 이의 버리려는 의지가 있는 능동이라면 갈라짐은 수동이다. 갈라짐은 당하는 일이다. 제3의 무언가가 그들을 갈라놓는다. 그들을 갈라놓는 그 무언가는 민족의 분열에서 생긴 갈등이다. 작가는 그런 갈등을 배경으로 두지만 흐릿하게, 자세히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공감의 범위를 넓힌다. 그쪽만의 역사이자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일수 있도록 한다.

3.

오이디푸스와 니하드의 차이, 사랑받는 아이라는 점은 작품 전체의 메시지로 확장된다. 가려져있던 눈을 뜨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말을 실천한다, 눈을 뽑는다. 자식이자 형제들로부터 편지를 전달받은 니하드는 자신이 사랑에서 태어났고 사랑받는 사람이란 걸 깨닫는다. 사랑만이 모든 걸 포용하고 용서하게 한다. 주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프롬은 말했다. 어머니가 주는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4.

원작에 대한 불만은 다시 쓰기의 욕구를 일으킨다. 이야기를 다르게 전개해 보거나 결말을 고쳐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만족으로 바꾸기 위해 다시 쓸 것이다. 다시 쓰고자 하는 이야기가 신화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화가 아닌 철저한 인화를 쓰고 싶었다든지, 지나치게 비극적인 주인공이 안타까웠다든지, 모든 걸 포용하는 사랑의 힘의 메시지를 주는 이야기로 바꿔 써보고 싶었다든지 하는 수없이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불편함의 발견이 발명의 시작이듯 불만족이 다시 쓴 이야기의 모태가 된다.

5.

다시 쓴 이야기는 분명히 독자적인 새로운 이야기다. 원본과 같은 점을 공유할 뿐이다. 그런데 뭐는 다시 쓰기가 아닐까. 성경과 그리스 신화, 벗어날 수 없는...

6.

패러프레이징이나 필사를 하는 심리에 대한 생각. 닮고 싶은 마음 혹은 이해해 보려는 노력.

7.

해야 할 말을 이미 어딘가에 다 해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할 필요를 못 느끼지 않을까. 이미 어딘가에 해놓은 말이 전달되지 않는 동안 타인에게 그는 실어의 상태로 보일 것이다. 어떤 말이든 발화와 전달의 순간은 같지 않다. 남은 모든 말은 아직 전달되지 않았을 뿐이다.

8.

나왈이 편지로 남긴 말이 쌍둥이들에게 전달된 순간부터 작품은 시작한다. 말을 들은 사람은 그것에 반응한다. 그 말에 임무 혹은 명령과도 같은 무언가가 담겨있다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들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한다. 들은 말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황제의 칙명을 받은 사신처럼.

9.

이오카스테와 나왈의 다른 점. 이오카스테는 곧장 자살하지만 나왈은 살아간다, 살아낸다. 나왈은 강한 사람이다. 나왈은 왜 강할까. 작품 초반 할머니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나왈에게 당부한다. 그래서인가? 그뿐인가? 모르겠다. 니하드와 오이디푸스는 다르다. 나왈도 이오카스테와 다르다.

이렇게 뭔가 잘 안 써지는 책은 오랜만이다. 파편적인 감상들만 머릿속을 떠돈다. 붙잡은 것들을 그러모아 하나의 감상문으로 좀 깔끔하게 쓰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영화도 좋았지만 책이 더 풍성하다. 북스타그램 아이디를 오스카 와일드로 해놓고 희곡을 정말 오랜만에 읽는다는 반성(?)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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