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는 갑자기 마음 한편이 저려왔다. 그가 던져 넣은 더러운 접시는, 오늘 저녁 그가 함께하지 못했던 단란한 가족 식사에 놓였던 깨끗한 접시들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가족 구성원 사이에 불쑥 끼어든 이방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살 바엔 차라리 사무실에 침대를 갖다 놓는 편이 낫겠군.’
이 문장은 『청소부 밥』(토드 홉킨스·레이 힐버트 지음, 신윤경 옮김, 위즈덤하우스)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지난날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내 나이 또래의 우리나라 많은 남자가 한 번쯤은 했을 법한 생각일 것이다.
얼마 있으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내 또래는 어렸을 적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남자는 밖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배운 세대다. 내 아버지 세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요즘은 일과 가정의 균형이라는 말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밤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게 미덕일 때가 있었다. 저녁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저녁 자리를 한다는 게 힘든 시절이었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자고 있고 아내는 나를 기다리다 지쳐 소파에서 잠들어 있던 적이 많았다. 어쩌다 일찍 들어가는 날엔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잠자리에 들기가 일쑤였다. 저 문장처럼 이방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하숙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책 읽기를 하며 지난날을 반성하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삶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인가 하는 질문을 나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남보다 조금 작은 아파트에 살면 어때서, 남보다 조금 좋지 않은 차를 타면 어때서, 남보다 조금 좋지 않은 옷을 입으면 어때서, 남이 소고기 먹을 때 돼지고기 먹으면 어때서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예전에 선배 한 분이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남보다 승진이 조금 늦는다고 인생도 남보다 늦는 건 아니라고. 이 말뜻이 그때는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지만, 이제야 조금씩 그 의미를 알아가는 것 같다.
내 선배 가운데는 20년을 넘게 전국을 돌며 근무하시다 높이 올라간 분들이 있다. 이미 나이는 쉰이 넘었다. 이분들은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지 못했다. 정작 자신은 높이 올라가고 남들이 볼 때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그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다.
가족이 나를 원할 때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게 마땅하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장기자랑이 있으면 함께 해주어야 하고, 운동회도 함께 해주는 게 마땅하다. 아내가 힘들 때 옆에 있어 주는 게 남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가족이 잘 먹고 잘살도록 하기 위해 나를 희생한 것인 양 함께 있어 주지 못한 것을 합리화한다.
내 부모와 나 사이에도 그랬다. 그래서 이 나이가 되어도 부모님과 사이가 서먹서먹한지도 모른다. 서로 살을 부대끼고 대화를 해야 사랑도 커가고 정도 커진다는 걸 몰랐다. 그것을 나이가 마흔이 넘어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가능한 한 칼퇴근한다. 될 수 있으면 가족과 함께하려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있으면 내 울타리를 벗어날 아이들인데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가족의 이방인이 아니라 같은 가족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남보다 승진을 하지 못하면 어떤가, 남보다 돈을 조금 더 벌지 못하면 어떤가, 그보다 중요한 게 시간이기 때문이다. 바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말이다. 남이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삶보다 내 가족이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래야 이 세상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때 후회 없었노라 말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