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젖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이 문장은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알프레드 랜싱 지음, 유혜경 옮김, 뜨인돌출판사)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20세기 초는 아문센과 스콧이 경쟁적으로 남극 탐험을 시도하던 시기다. 이 책의 주인공인 어니스트 H. 섀클턴(1874-1922) 역시 남극 탐험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지만 뒤늦게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언제나 아문센과 스콧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남극점 최초 정복의 영예는 노르웨이의 아문센에게 돌아가고 스콧은 남극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이 소식을 듣고 목표를 남극 대륙 횡단으로 바꾼 섀클턴은 스물일곱 명의 대원과 함께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남극 원정에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온통 젖었지만 그런데도 행복하다.’ 이 구절은 당시 대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맥니쉬라는 사람이 폭풍우를 이겨내며 쓴 일기의 한 구절이다. 이 문장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도 했지만, 행복하게도 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음에, 이들에 비하면 내 처지는 훨씬 낫다는 생각에.
이 책은 동상으로 발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과 온갖 역경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28명의 영웅 이야기다. 634일간의 처절한 생명을 건 싸움이 흥미진진하게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살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을 이겨가며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대원 모두를 구조해냈다. 그것도 맨몸으로.
나는 이것이 섀클턴의 동료,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감히 말하고 싶다. 사랑은 종종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일을 만든다. 왜냐하면, 사랑 말고는 이 기적 같은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가장 나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온갖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시련이 죽음을 앞둔 시련인가? 그보다 못한 시련인가?
나는 지금까지 죽음을 눈앞에 둔 시련은 겪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들이 죽음 앞에서 벌인 삶에 대한 의지를 느끼면서 많이 반성했다. ‘그래 지금까지 내가 겪은 시련은 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토록 힘들어하고 나 자신을 못살게 굴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빙빙 돌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련이 내게 닥쳐왔고, 앞으로도 닥쳐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내가 있을 자리가 있고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렇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