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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숲 Oct 08. 2021

엄마가 넘어지는 순간 깨달았다

[팔순의 내 엄마] 발가락 골절 사고 후 급격히 쇠약해진 엄마와의 여행




막 해가 넘어가려는 바다는 눈부신 광채를 내며 빛났다. 태양은 피를 토하듯 붉은빛을 바다에 쏟아내고 검푸른 바닷물 속으로 자맥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철 지난 해변가에서 장난질을 치던 아이들도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고 나들이객들도 해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해가 사라진 바닷가에는 금세 어둠이 밀려들었다.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펼쳐 놓았던 작은 그늘막을 정리하고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동생과 내가 그늘막과 씨름하느라 잠시 엄마에게서 눈을 뗀 순간 일이 벌어졌다. 


쿵. 아이쿠…


엄마!!! 나와 동생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엄마에게 달려갔다. 바닷바람이 춥다며 덮고 있던 무릎 담요를 든 채 나가떨어진 엄마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엄마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고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뼈를 다치지는 않으신 듯했다.


근래 들어 엄마가 자주 넘어진다. 1년 전 욕실에서 미끄러져 넘어져 새끼발가락 골절로 한 달간 깁스를 하고 지냈다. 새끼발가락이든 발목이든 깁스를 하고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다. 엄마는 한쪽 발에 깁스를 하고 에누리 없이 꼬박 한 달간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다. “아유, 이제 살 것 같다” 깁스를 풀던 날 엄마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때 이후부터 몸이 확실히 달라…다리가 내 다리 같지가 않고 힘이 안 들어 가.”


깁스를 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하신 말씀이다. 한참 운동을 하지 못해서라고 엄마를 안심시켜 드렸지만 깁스를 풀고 난 이후 엄마 다리는 늘 퉁퉁 부어 있었다. 꼭 소 다리의 도가니처럼. 그 부위를 살짝만 눌러도 푹푹 들어가는 것 같았다. 꼭 밀가루 반죽을 찌르는 것처럼. 병원에서도 더 이상 해 줄 것은 없다며 시간이 좀 지나야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말뿐이었다. 그 후로 엄마는 쉽게 피곤해했고 기력이 예전만 못해 보였다.


우리 형제들은 엄마의 낙상에 대해 민감하다. 외할아버지가 겨울철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신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시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욕실에 미끄럼 방지 매트를 깔아 드리고 다닐 때도 늘 손을 잡고 다니는데 이런 데서 넘어지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부모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 아이가 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엄마도 그 짧은 순간에 사달이 난 것이다.


직전에 다녀온 선운사에서 엄마는 입구에서부터 ‘이 절도 한참 걸어야 하는데…’하며 자신 없어했다. 그러나 셔틀버스도 없고 외부차량은 출입이 안돼서 걷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엄마 살살 걸어봐. 정 힘들면 가지 말고.”

“그래” 

마침 선운사에는 꽃무릇이 온 산사를 붉게 물들여놓고 있었다.


“엄마 우리 여기서 사진 한 장 찍어요.”

“됐다. 안 찍어. 이 얼굴로 무슨 사진을 찍니? 니들이나 찍어.”

“그래도 기념사진은 있어야지.”


동생과 나는 힘들다고 화단 턱에 주저앉은 엄마를 가운데 두고 어정쩡하게 포즈를 취하고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사람들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화사했건만 엄마 얼굴은 한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한 장만 더 찍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힘들게 일어나 무거운 돌덩이를 끌고 가는 고행자처럼 선운사로 향했다. 그러나 오래 걷지 못했다. 10m 정도 가서는 무릎에 손을 받치고 구부정하게 서서 숨을 골랐고 다섯 걸음 걷고 앉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 엄마의 뒷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꽃을 보면 늘 먼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어 달라던 엄마였는데. 오늘은 보기 흉한 얼굴로 사진에 찍히는 것이 싫다며 그 고운 꽃밭에서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엄마 그만 가자. 선운사는 여러 번 왔었잖아. 잠깐 바람 쐤으면 됐지 뭐.”

“아냐 천천히 쉬엄쉬엄 가면 갈 수 있어.”


엄마는 동생 손을 의지해 다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철원 은하수교 언덕까지도 거뜬하게 올라갔었는데 며칠 사이에 이렇게 기력이 떨어질 수도 있는 건가. 고령의 노인들은 ‘밤새 안녕’이라고 한다더니 엄마가 딱 그랬다.


엄마는 그렇게 다리를 끌듯하면서 선운사 긴 들머리 길을 완주(!)하여 천왕문에 당도했다. 사천왕 앞에서 숨을 고르고 몇 차례나 합장을 했다. 그러고는 또 힘이 드시는지 이번엔 천왕문 벽에 기대어 한참을 서 계셨다. 나는 극락교 위에서 그런 엄마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잠시 뒤 동생이 엄마 손을 부축하는가 싶더니 두 사람은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극락교 아래 흐르는 도솔천이 마치 레테의 강처럼 엄마가 멀리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나중에 동생에게 들으니 엄마는 대웅보전에 올라가서 불전을 놓고 삼배까지 올렸다고 했다. 절에 오면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러고는 다시 한참을 걸어 내려와 차를 타고 구시포 해수욕장에 온 것이다. 해변에 도착해서도 엄마는 차에서 내리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함께 일몰을 보자는 우리의 성화에 할 수없이 차에서 내린 것이다. 


‘당신의 다리가 그렇게 무겁더란다.’ 결국 엄마의 다리는 균형을 잃었고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걸려 힘없이 나뒹굴었다. 그 순간 조금 과장을 섞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엄마의 힘없고 늙은 육체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은 엄마의 애처로운 얼굴을 보았다. 그 참담함이라니. 그 찰나는 엄마가 삶을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져 가고 있음을 너무도 명징하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엄마를 일으켜 세워 드리고 몸 상태를 확인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엄마 어디에 걸린 거야?”

“오늘은 다리가 이렇게 무겁다.”

“엄마 추석 쇠고 좀 쉬었어야 했는데 꽃 진다고 너무 무리하게 왔나 봐. 엄마 미안.”

“아냐. 엄마도 오늘 좋았어. 바다도 보고, 꽃도 보고.”


선운사 앞 점심을 먹었던 식당 여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모시고 여행 많이 못 다닌 것이 제일 후회가 돼요.”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4년이 지났는데 자주 못 모시고 다닌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된단다. 딸들이 엄마 모시고 다니는 거 보면 너무 부럽고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단다. 어머니 다리에 아직 힘이 있을 때 좋은 데 구경 많이 시켜드리라고 한다.

 

“엄마, 다리에 힘없으면 우리가 휠체어 태어서라도 바깥 구경시켜 줄게.”

“싫다. 그렇게는 안 다닌다.”


엄마 말처럼 언제까지나 당신의 두 다리로 오래도록 세상 구경하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과연 얼마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일까. 


[20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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