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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숲 Aug 17. 2021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 깨밭과 엄마

[팔순의 내 엄마] 깨 터는 날은 세상없어도 챙기는 엄마



“엄마 나 내일 대모시(*우리 시골 동네 이름)  못 갈 것 같아. 다음날 백신 맞아. 컨디션 조정하려고.” 

“깨 베는 날은 가야 된다.”

“언제 베는데?”

“아직 모르지, 내일 가봐야 알지.”


깨를 벨 즈음에는 엄마가 나서서 일손을 챙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시골에는 작은 야산을 일군 3백여 평 남짓한 텃밭이 있다. 고랑을 사이에 두고 옆의 언덕에는 조부모님과 아버지 묘소가 있다. 


애초에 이 땅은 농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잡목을 베고 땅을 일구더니 농지를 만들어 사과나무를 심으셨다. 쓸모없는 땅을 과수원으로 만든 것이다. 아버지는 주중에는 직장에 나가고 주말이면 엄마와 함께 시골에 내려가 사과 농사를 지었다. 한창 농사일이 바쁠 때에는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흙투성이가 돼서 집에 돌아오곤 하셨다. 그때까지 저녁들도 못 드셨는지 허겁지겁 저녁을 드셨다. 그리고 등이며 허리에 잔뜩 파스를 붙이고 곪아 떨어지셨다. 나는 두 분이 정말 이해가 안 됐다. ‘힘들게 왜 저걸 하실까. 별로 돈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내 기억으로는 한 3-4년 과수원을 하셨던 것 같다. 나중에 엄마에게 왜 과수원을 접었냐고 물었더니 ‘너무 힘이 들고 별로 돈도 되지 않았단다.’ 




그렇게 농사를 접으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들깨를 심으셨다. 사과에서 깨로 바뀌었을 뿐 두 분의 생활은 이전과 똑같았다. 수확량이라야 우리 식구들 1년 들기름 짜 먹으면 그만이었다. 모르긴 해도 시골 오가는 자동차 휘발유값이 더 들어갔을 것이다. 기력이 딸리는 나이가 되어도 농사일을 그만두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과수원을 가꾸고 깨 농사를 지은 것이 돈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 땅에 대한 애착이었을 것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땅에 대한 애착… 가난한 집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시골에서 해 먹고살게 없어 어린 나이에 대처로 나와 직장을 얻었다. 일머리가 좋아서 다행히 빨리 자리를 잡으셨고 먹고 살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늘 일찍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지 시골에 가는 것을 좋아하셨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눈앞에 펼쳐지는 마을이며 산을 보면서 입버릇처럼 ‘아… 좋다’라고 하셨다. 일찌감치 할머니 무덤 아래 당신의 가묘도 만들어 놓았다. “이제 집도 지어 놨겠다. 아버지는 이제 여한이 없다.” 어느 봄날 햇빛 따스한 날 할머니 무덤가에 앉아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홀연히 떠나셨다. 그리고 그곳에 묻히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텃밭을 둘러싸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소유권이 남동생에게 이전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그 땅은 남동생 땅이었다. 그러나 조상묘 옆의 그 땅은 애초에 팔 수도 없으니 경제적 이익을 볼 일은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땅을 그냥 놀려 둘 수도 없고 농사를 지을 사람도 없고 소작을 줄 정도로 넓지도 않아서 한마디로 대략 남 감이었다. 어찌 보면 그 땅은 남동생 입장에서는 짐이었다.  


“그냥 놔둬.”

“아버지 산소가 있는데 그냥 놔두면 어떡해? 잡목이 우거지고 곧 드나들 수도 없게 될 걸.”

“농지를 유지하려면 농사를 지어야 해. 시청에서 가끔 시찰도 나온다나 봐.”

“그렇다고 누가 농사를 지어?”

“그럼 다른 사람들처럼 도라지 씨만 뿌려 놔.”


우리 형제들은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얘기만 주고받다가 헤어졌다. 얼마 후 남동생이 직접 농사를 짓겠다고 나섰다. 남동생은 그야말로 농사에 관해서 허당일 뿐만 아니라 아예 시골에 오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도 아버지가 같이 시골 가자면 싫다고 내빼곤 하지 않았던가. 그런 동생이 농사를 짓겠다니… 


“내가 농사를 지어야겠어.” 

“네가? 네가 무슨 농사를 지어?”

“너 허리도 안 좋은데 어떻게?”

“얘, 관둬.” 

“약값이랑 병원비가 더 들어가겠다.”

“그러다 괜히 몸만 더 상한다.”



정말 가당치도 않았다. 무엇보다 동생의 몸으로 농사는 무리였다. 젊을 때 허리를 다쳐 툭하면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신세에 농사라니. 농사짓는 게 그리 쉬운가. 






그런데 주변의 만류에도 동생은 정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밭을 일구고 농사짓는 이모에게 깨 모종을 얻어오고, 김을 매고 물을 줘 가며 밭일을 해갔다. 다른 형제들에게 도움도 청하지 않고 오롯이 혼자서. 처음에 긴가민가 하던 우리도 함께 나섰다. 특히 큰언니는 남동생이 걱정돼서 자기가 더 열심이었다. 첫 해 수확은 형편없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수확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건’이었다. 그다음 해에는 수확량이 조금 많아지더니 이제는 제법 양이된다. 처음엔 조합에 가서 비료도 제대로 못 타월 정도로 어설프기만 했던 동생도 이제는 제법 농사꾼 티가 난다. 


동생은 그렇게 농사지은 들깨를 짜서 해마다 누이들에게 들기름 선물을 한다. 몇 해 전에는 한쪽 구석에 도라지와 더덕을 심더니 그다음에는 산수유나무 열 그루를 심었다. 산수유나무는 들짐승들이 다 파헤쳐놔서 그대로 죽어버렸다. 더덕과 도라지도 식구들이 한번 실컷 먹고 나니 끝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6년이나 키웠는데 허무하다.”

“이거 우리가 다 먹어도 되나. 좀 팔아야 되는 거 아냐.”

“이렇게 생긴 걸 누가 사?”

“근데 향이 진짜 진하다. 너무 맛있어.”

“맛있네. 근데 모양이… “


말들은 그렇게들 했지만 우린 그 더덕이 너무 아까워서 잔뿌리 하나 버리지 못했다. 



봄가을로 깨를 심거나 베는 날처럼 일손이 많이 필요한 날은 형제자매들이 다 모여 일손을 보탠다. 엄마는 제일 큰 일꾼이다. 응달에서 쉬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맨날 아프다가도 대모시만 오면 기운이 솟으시는지 우리보다 일을 훨씬 많이 하신다. 일 솜씨는 누구도 엄마를 따라갈 재간이 없다. 게다가 깨에서 검불을 걸러내는 ‘키’ 질은 엄마밖에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깨 터는 날 만큼은 꼭 엄마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키질만큼은 잘 배워지지 않아서 지금도 키질은 엄마 몫이다. 남동생도 깨 베고 터는 날만은 SOS를 친다. 

 “이제 좀 지나면 깨 털러 가야 하는데…” 요즘 관절이 더 안 좋아져서 매일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도 엄마는 벌써부터 깨밭 걱정을 한다. “엄마가 가 봐야지. 그거 혼자 안쓰럽지 않니?” ‘에구, 우리 엄마, 아들 걱정돼서 어떻게 눈 감으시려고…’ 



깨 터는 날은 형제자매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다.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깨 밭은 꼭 아버지가 우리 형제 모두에게 남겨 주신 유산 같다’. 아버지 죽어서도 싸우지들 말고 얼굴 보면서 사이좋게 지내라는. … 그 유산을 잘 지켜주고 있는 동생도 참 고맙다. 올해도 아버지 산소 옆에 붉은 목백일홍이 활짝 피었다. 몇 해 전 큰언니가 아버지가 좋아하실 거라며 심은 나무다. 한해 한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형제자매의 얼굴에서 엄마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 문득 형제자매는 나의 미래이기도 하다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올 깨 베는 날은 하필 내가 백신 접종일과 겹친다. 절대로 빠지면 안 된다고 단속을 하던 엄마도 올해는 푹 쉬라고 한다. 


[202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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