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아 Apr 01. 2022

노동 마일리지

노동마일리지가 비행기는 태워주지 못해도 

지금의 나는 플라워 스튜디오와 패키지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내 첫 명함의 직함은 문구 디자이너였고 그림도 그려서 제품을 만들었으니 일러스트레이터도 함께 적혔다. 문구 디자이너는 그 시절 대단히 유행 했던 문구 브랜드의 영향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꿈꿔왔던 일이었다. 


두 번 째 명함의 회사에서의 나는 여러 가지로 새겨지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편집 디자이너였다. 그 사이 프리랜서가 되었다가 세 번째 명함부터는 나의 브랜드의 명함을 만들었고 디렉터 또는 플로리스트의 직함이 적혔다. 그리 고 꽃을 시작한 지 5년 차가 될 때 package design brand 가 적힌 명함에 내 이름이 자의와 타의가 섞여 다시 새겨졌다. 명함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mother라는 새로운 나의 역할, 업무와 함께. 


고등학교 시절, 풍족하지 않은 집의 둘째 딸로 입시 미술을 준비했는데 그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고 대학진학을 향해 마냥 달렸다. 대학입학. 그것에 모든 해답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림 실력도 별로였고 공부도 별로였다. '청소년기에는 근자감 같은 것이 원래 장착되어있는 건가.' 딱히 아무도 내게 큰 신뢰가 없었는데 그 시절의 나는 나를 굳건히 믿어줬다. 우습게도 결과를 내는 지금보다도 더. 대학생이 되자 교수님이 내주는 과제의 주제부터 나의 몫이었고 그때서야 주어진 자율 성에 나는 영수증이나 택, 엽서, 포스터 따위를 모으는 페이퍼 콜렉터라는 걸 알았다. '나는 이것을 정말 좋아해요.' 언제든 자신감있게 말할 준비가 돼 있었다.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애정의 마음들이었다.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서도 서점과 작은 샵 둘러보기가 제일 설. 브랜드를 대변하는 작은 종이들의 컬러와 디자인들은 너무 매력적이었다. '오마이갓 이 옷에 이렇게 같이 행잉 된 택이라니, 택이 투명도가 있어 같이 레이어드하는 것 너무 사랑스럽다. ' 나의 시선은 그렇게 맞춰져 있었다. 두둥-하고 소리 내며 시작하는 넷플릭스가 당연한 자들은 모를 것이다. 그 시대에는 핀터레스트가 없었음을. 나에게 올 수 있는 정보는 고작 대형 서점의 해외 디자인 서적이었는데 이 사실에 너무 이질감을 느끼지 말았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흥건한 정보가 아닌 오직 유일한 통로의 기쁨을, 비행기를 타고 가서야 고대하고 만나는, 하루를 몽땅 보내도 다 읽을 수도 없는 많은 서점 안에서의 그 짜릿함을 이제는 못 느낀다니 아쉽다. 간판이나 길거리의 붙은 페이퍼들이 그 브랜드를 잘 나타낼 때 컨셉이 확실한 아름다운 디자인을 보면 심장이 뛰었다. 그 나라의 작은 영수증과 티켓들을 모아 보면서 색감과 타이포 하나하나를 세심히 관찰했다. 그럴 때마다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 




이전 회사의 편집물. 29 페이퍼라는 얇은 매거진을 만들었다.


인생의 대부분 것들은 시소와 같이 올라간 만큼 내려오고 내려간 만큼 올라가니까 나의 디자인 사랑은 두근거리게 좋고 또 그만큼 힘들었다. 꿈꾸고 이상적으로 두는 기준이 높은 만큼 나를 거기에 맞춰가야 하기에 더 어려웠다. 그 마음을 활용할 줄 아는 회사의 보스들은 참으로 똑똑한 사람들이고 그런 보스들은 세상에 많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꽤 많은 열정을 갖다 바쳤고 내 노동 마일리지는 야근하거나 주말에도 종종 사용됐다. 처음이었던 문구 디자이너의 직함은 '그러면 이만 안녕'하고 칼 같이 버려지고 저 멀리서 새로운 직함이 달려와 '안녕 이제 내 차례다!' 하고 바톤터치를 한 것이 아니었다. 디자인 영역을 더 넓혀볼까 더 큰 회사들은 어떨까하는 궁금증에서 자연스레 시작되었다. 새로운 회사에서는 회사가 업무가 시시때때로 변경되기도 했고 따라서 나도 이것저것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회사를 7년 차 정도로 마무리할 시점에는 프로젝트와 얇은 두께의 브랜드 매거진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갖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브랜드의 인터뷰 내용을 담고 협업 제품을 만들어야 하다 보니 소규모 브랜드의 대표들을 만날 일이 많았는데, 그때의 나는 내가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도 모르는 채 '일을 한다'에 무작정 가치를 쏟으며 일했다. 외향과 내향은 내성적이다의 성격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외적인 활동으로 친구를 만나거나 하여 풀어내는지 내적인 활동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풀어내는지의 기준이다. 나는 나를 모르는 채 보냈다. 때론 내가 아는 한 겹의 얇은 인맥들이 나를 대변해주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으며 그것들이 무엇을 가져다줄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도 한켠에는 있었던 것 같은 부끄러운 마음을 이제 와 고백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첫 만남에 편안한 사람일 수는 있으나 더 깊숙이 친분을 쌓는 데 오래 걸리는 사람이고 쉬이 나를 다 보여주고도 쑥스럽지 않은 그러한 것을 잘하지 못한다. 그러한 것들이 자꾸 나 스스로 아쉬운 사람이라 느끼게도 했다. 일과 관계들로 들 뜬 기분과 동시에 곧잘 바닥의 기분도 느꼈다. 나를 잘 모르고 중심이 없어 누 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였다. 





플라워 브랜드에서의 디자인

내 노동 마일리지는 내가 좋아서 쌓았다. 그것이 비행기 마일리지처럼 다시 나에게 혜택으로 비행기를 태워주진 못했다. 그렇게 노동 마일리지는 혜택 없는 마일리지 제도인줄 알았는데 새로운 직업을 갖고 알게 됐다. 이것이 혜택이 적지 않은 적립상품이었다는 것을. 내가 사용했던 나의 쓰임새는 내가 이미 써버린 것임에도 돌아온다. 플로리스트의 나는, '디자이너였던 나' 덕분에 초반에 5할 이상을 얻었다. 프로젝트 협업 건으로 만난 관계 중에 적게나마 지인이 되어 남아있었고 이제 시작이었던 나의 꽃 브랜드와 감사히도 작은 협업들을 진행해줬다. 이전 회사는 힙하다고 소문난 온라인 플랫폼이었는데 신선하고 새로운 방향성으로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곳이었다. 그래픽 디자인을 제법하는 플로리스트에게 오는 질문은 '원래 꽃을 하셨어요?'였고 나의 이전 회사의 이력이 그들에게 나 대신의 믿음을 주었음을 인정한다. 




지금의 패키지 브랜드 디자인


디자인만 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모를 일도 많았다. 시즌별 상품 기획, 간단한 카피 쓰기, 인터뷰, 촬영, 상품 등록을 하며 '나는 디자이너인가 무엇인가.' 숱하게 고민하게 한 것들이 나의 플라워 스튜디오를 조금은 남다르게 보이게 했다. 필름 사진은 문구회사에서 시작했는데 오랜 친구가 된 첫 회사의 동료가 필카를 권유했다. 게다가 그 시기는 여행 사진 다이어리가 대흥행이었던 문구시장의 전성기였다. 그 이후 출장 아닌 개인 여행에서도 필름 사진을 늘 찍어두었다. 그 켜켜이 묵힌 사진들이 지금의 패키지 브랜드에서 엽서와 스티커 될줄은 당연히 몰랐다. 지금 기고하는 이 글도 이제는 아는 언니가 된 이전 회사 동료의 권유로 쓴다. 이렇게 나는 과거의 나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꽃 일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화보 작업이 제일 흥미로웠고 재밌었다. 매일 이러한 일이 들어왔으면 했다. 하지만 화보는 지인을 통해 많이 이뤄지다 보니 내게 기회가 닿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보 작업을 많이 하는 플로리스트들이 착실히 플로리스트 전이나 또는 현재에 관련된 마일리지를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의 마일리지 를 ‘어쩌면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하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괜한 부러운 마음이 들 때는 내가 모르는 그들의 적립금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했다. 그들이 쌓아왔을 시간을 나는 한번도 들을 적이 없기에 궁금해할 수는 있어도, 절대 쉬이 판단해버리면 안되는 것이었다.


노동 마일리지는 커피를 마시고 받는 적립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나의 일말의 능력과 소량의 운 그리고 많은 인내심이 담겨있었다. 그니까 회사에 나를 모조리 갖다 바치지는 않되 힘들 때는 다시 나한테 긍정으로 돌아온다는 그 적립제도의 규칙이 당신에게 조금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 건가?’ 의 의문이나
 열심히 보낸 하루에도 마음에 물음표가 든다면 제가 명확하게 말해드릴께요. 오늘도 당신은 제대로 마일리지를 적립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은 꽃말로 살 수 없을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