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고 혹은 샌디에이고, 살면서 한두 번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날씨 좋기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에서도 살기 좋은 도시라던가?
그 시절, 아직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이 여기에 가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가자!'라고 했다.
남편이 유학 준비생이라는 것은 처음 만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소개팅으로 만나기 전 무엇을 하냐는 질문에 '토플 공부해요'라길래, 친구들이 그렇듯 '교환학생 가세요?' 했는데, 몇 년 후 박사 유학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샌디에고와 마찬가지로 '박사'는 나와 먼 단어였는데. 그때는 아직 만나기도 전이니 그렇구나, 했지만 동시에 용기 있고 계획적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만난 지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났다. 인턴이었던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좌충우돌 신입사원의 시간은 쉽지 않았다. 매일매일 조금씩 떨어지는 체력과 비례해 회사와 일에 익숙해졌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 당시 남자친구는 석사생이었는데 점차 박사 유학의 길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같이 갈까? 같이 가면 먼 타지에 가족도, 친구도 없는데. 내가 이토록 힘들게 적응해 온 회사 생활이 아무 부질없는 게 될 텐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서서히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 인생을 바꿀 결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몇 가지가 있다.
1.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 미국행을 찬성했다.
2. 남자친구와의 헤어짐을 상쇄할만한 것이 한국에 없었다.
3. 결혼한 선배들이 그랬다. 결혼과 박사는 상관이 없고 시작은 어디서든 힘들다.
1.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 미국행을 찬성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고민 상담을 했다. 대학생 때부터 사귀었으니 주변 친구들도 남자친구를 몇 번은 봤고, 우리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 같이 가면 포기해야 할 것들에 대해 얘기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부모님과 난생처음 똑 떨어져 사는데, 얼마마다 볼 수 있을지 모른다.
- 이 고민에 대해 한 친구가 그랬다. 원래 독립하면, 한국에 살아도 부모님은 자주 보지 못한다고. 네가 부모님 집이 서울에 있는 행운아라 같이 사는 것이라고.
그리고 결혼하면 더 가끔 밖에 못 보고, 어떤 때는 그게 더 편하다고. 오, 친구가 나보다 더 어른처럼 보이면서 갑자기 독립에 대한 설렘이 찾아왔다.
게다가 자기가 아는 유학생 친구는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는데, 그게 바쁜 직장인 친구들이 일 년에 한 번 모이는 이유가 되어준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데, 나 잘 살 수 있을까?
- 여기에도 역시 친구들의 응원이 큰 도움이 됐었다. '그럼, 너의 생활력이면 당연히 잘 살 수 있지!'부터, '네가 하고 싶은 거면 너는 할 수 있어. 나는 걱정 안 해.'와 같은 무조건적인 믿음과 응원이 고마웠다. 가족들도 그랬다. 기회가 있을 때 한국 밖에 나가 살아보라고 했다. 특히 항해사로 커리어를 시작해 해외영업을 해 온 우리 아빠가 가장 굳세게 찬성했다. 명절 때 얼굴 보고 식사한 남자친구에 대한 믿음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단 한 명도 미국행을 반대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참 '헬조선'이라는 키워드가 유행하고 있을 때였기에 더 긍정적인 반응이 왔을 수도 있다.
때로는 내 주변을 믿는 것이 편할 때가 있다. 대학교에서 공부가 힘에 부친다고 느껴졌을 때 '할 수 있으니까 이 대학에서 나를 뽑았겠지!'라고 생각한다거나, 도대체 회사가 나를 왜 고용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실수를 해 자괴감이 들 때 '나보다 경험 많은 상사들이 나를 뽑은 건 싹이 보여서일 거다!'라고 되뇌는 것처럼.
그래서 가족과 친구들을 믿고,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2. 남자친구와의 헤어짐을 상쇄할만한 것이 한국에 없었다.
당시에 가장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미국에 같이 가기 위해서는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겨우 신입사원, 승진 한 번 못해보고 회사를 그만둬야 하다니.
취업난이 심각한 시기였다. 대학교 3, 4학년이 되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점점 말이 없어졌다. 인턴이든 정규직이든 할 것 없이 연이은 탈락 소식에 우울한 분위기가 모임을 지배했고, 비교적 일찍 취직한 친구들과 아직 취준생인 친구들은 잘 만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포기하기 아까울 만큼 좋은 팀원들을 만나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부족함 없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았을 때 '행복함'의 무게 추는 미국행으로 기울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한국에 남아서 일을 계속한다 vs. 회사를 그만두고 남자친구와 미국에 간다.
상황 1을 생각해 봤을 때의 장점은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나의 '일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사 사람들은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일 자체는 딱 내 적성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일 때문에 남자친구를 포기했다가 나중에 일이 싫어지면 어떡하지? 딱 그맘때쯤, 많이 의지했던 사수님이 부서 이동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일 년 반, 혼자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겠지만 혼자서 하기에는 아직 무서웠다. 앞으로 부담이 점점 커질 텐데 나는 이 커리어와 미국행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그래서 결국 상황 2를 선택했다. 놓기 아까운 직장과 팀원들이지만, 일은 미국에 가서 다시 하면 되지!
3. 결혼한 선배들이 그랬다. 결혼과 박사는 상관이 없고 시작은 어디서든 힘들다.
결혼을 한참 고민하던 당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내 주변에는 결혼한 또래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결혼 선배는 회사의 팀원분들이었다. 나는 팀의 막내였고 여서일곱명의 팀원 중 대다수가 기혼자, 결혼 선배분들이다.
외국계 기업이라 사적인 영역을 많이 침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점심 식사를 같이하고 동고동락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어느 여름날, 화창한 여의도에서 커피 한 잔 들고 사무실로 오는 길에 연애, 결혼 얘기가 나왔다. 과장님께 '남자친구가 곧 박사 유학을 갈 것 같고, 그것 때문에 결혼은 어찌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결혼하는 것과 박사 유학이 무슨 상관이야? 결혼할 거면 하는 거지!
그때 나에게는 유학이 너무나 큰 산처럼 보였기에 저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알 수 있다. 그건, 이미 인생의 동반자를 맞이한 사람의 마음가짐이었다. 어떤 시련이 있을지 모르는 인생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같이 가기로 마음먹어본, 그래서 실천한 사람의 마음가짐.
일할 때는 정말 로봇 같이 최고의 업무 효율을 자랑하던 과장님의 마음에 저런 뜨거움이 있었을 줄이야.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말은
한국에서 시작하든 외국에서 시작하든 빚은 생길 거고 갚으면 된다.라는 말이었다.
그즈음 자가 아파트로 이사 가신 대리님이 그러셨다. 나에게 너무 크게 느껴지는 돈의 단위 '억'대 대출을 받고 과감하게 이사를 가셨을 쯤이다.
결혼에 돈이 고민이라면, 질러버리라는 응원이었다.
유학과 재정적인 문제를 떼어 생각할 수 없었는데, 이 대화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렇구나, 진정한 사회인이자 어른이란 용감한 거구나!
그렇게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 나 자신, 무엇보다도 (구) 남자친구, (현) 남편을 믿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한국을 떠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