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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anne Jan 08. 2021

04. 줌미팅

전염병이 창궐한지 어언 1년 째, 이제는 출근길 지하철이 낯설다.


회사의 적극적인 재택 근무 권고는 그다지 높지 않았던 내 애사심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 세상 이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다음 번엔 재택 1년차를 맞아 돌아보는 재택 근무기를 써봐야겠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 게 있다면 바로 화상 회의이다.


예약된 시간 30분 전, 잠옷을 멀쩡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20분 전, 그래도 완전한 민낯은 조금 부끄러우니 약간의 피부톤 보정을 위해 선크림 정도를 발라준다. 줌에는 비디오 필터 효과가 있어 그래도 신경이 덜 쓰인다. 10분 전, 아이패드가 나와 내 방 벽지 외에 다른 것들은 절대 비추지 않도록 각도 조정을 한다. 가상 배경을 쓰시는 분들도 많지만, 오히려 내 존재를 강조해주는 크로마키의 느낌이 싫어서 벽지를 배경으로 두고 쓰고 있다. 5분 전, 전달 받은 회의 ID와 비밀번호를 확인해서 접속한다. 접속할 때는 내 카메라와 마이크가 꺼져 있는 지 최소 두 번 확인한다. 회의실에는 나처럼 일찍 들어온 이들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끈 채로 기다리고 있다. 회의실에 도착은 했으나 서로 인사는 안 한, 그런 애매모호한 상태다. 정확히 회의 시간이 되어서야, 카메라를 켠다. 다른 참석자들의 비디오도 하나 둘 씩 켜진다.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발표자가 화면을 공유하고, 마이크 음소거 상태의 다른 참석자들은 발표를 듣는다. 질문 있으시면 말씀 달라는 발표자의 말에 눈치 싸움이 시작되고, 먼저 음소거를 해제한 사람이 발언권을 잡는다. 내 음소거를 해제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동향을 파악해야 한다. 눈치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발표자가 추가로 하실 말씀 있으시냐고 묻고, 더이상 음소거를 해제하는 사람이 없을 때 회의는 끝난다. 음소거를 해제하고 수고하셨습니다라고 경쾌하게 말한다. 직책자들이 먼저 나가는 걸 확인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나가기를 누른다. 다시 내 방의 평온한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모든 회사의 일과 분위기가 그렇듯, 화상 회의의 적용도 부서 바이 부서라는 대원칙을 따른다. 경험한 바로는 크게 1)'화상 회의 그거 좋지.. 그래도 얼굴 보고 하는 것만 못하지 않나? 회사에서 봅시다'파와 2)'화상이나 대면이나 크게 다를 것 없다'파 3)'아침에도 화상회의 점심에도 화상회의 저녁에도 화상회의'파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에 해당하던 옆 팀은 회의도 많아서 재택률이 최고치에 다르던 시즌에조차 거의 대부분 출근을 하는 모습을 보였고, 3)에 해당하던 옆옆 팀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팀장에게 얼굴을 비춰 본인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했다. 내가 있던 이전 팀은 조금 특이한 케이스로, 메신저 그룹 채팅 기능을 활용한 회의를 시시때때로 함으로써 화상 회의의 번거로움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냈다. 다들 굳이 서로의 얼굴을 봐야할 필요를 못 느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회의가 필요한 날엔 출근해서 마스크 쓴 채로 회의실에 옹기종기 모였던 걸 떠올려보면 위의 분류 중 1)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부서 이동을 한 지금, 우리 회사에 2)에 해당하는 부서가 있었다는 사실에 작은 규모의 문화 충격을 받고 있다. 외부와의 미팅이 아닌 내부 회의도 익숙하게 줌 미팅으로 진행한다. 심지어 둘 이상의 팀원이 출근해 있어도, 각자 자리에서 따로따로 접속을 한다. 사실 하나 둘 사무실로 출근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로 사무실에 출근해 있는 사람들끼리의 의견이 우선되어 종종 재택 근무자가 소외된다는 점도 들 수 있는데, 개별 접속은 그런 소외를 미연에 방지한다. 더불어, 소규모 회의라도 일정은 최소 한 시간 전에 공지가 되어 인간다운 꼴을 갖추고 비디오를 켤 수 있도록 한다. 재택 근무 시대의 정석이다.

 

이렇게 완벽한데도 내가 아직까지 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 발언자 외 참석자들의 침묵 탓이다.


오디오 겹침 등을 막기 위해 입장 시에는 마이크를 끄고, 발언할 때에만 마이크를 켜는 게 화상 회의의 기본 예의로 여겨진다. 혹 그 사실을 몰랐더라도, 대규모 회의에서 모르는 이의 통화 내용이나 가족과의 대화 내용을 원치 않게 들어야 하는 상황-실제로 오늘 130명 가량 참석한 회의에서 두 번이나 발생했다. 나머지 129명이 조용히 내 통화를 듣고 있었다니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아차리셨다면 등에 땀 좀 나셨을 듯하다.-을 겪고 나면 회의 입장 전 마이크 음소거 상태를 가장 먼저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만 과연 10명 이하의 회의에서 음소거가 효율적일까. 원탁에 둘러 앉아 이것저것 말하는 것과 손 들고 발표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특히나 손 들고 발표하는 건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하는 거라는 아이들의 굉장히 이상한 편견 속에서 자라난 한국의 소심쟁이로서, 나 이외의 모두가 고요한 가운데 마이크를 켜고(적극적인 행동 1) 무언가 발언(적극적인 행동 2)을 하려면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 며칠 전엔 사무실에 나가서 줌 미팅에 참석했다가, 먼지 내려 앉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조용한 사무실에서 홀로 마이크를 입에 대고 말하고 있음을 깨닫고 갑작스러운 손떨림 증상이 찾아오기도 헀다.


연말에 친구들과 줌 송년회를 했었다. 그 때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는데,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 나를 지목할까봐 한껏 긴장해 있다. 물론 회사 업무와 친구들과의 모임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완전히 다른 성격의 모임이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어느 정도의 지방 방송도 허용되고 준비 되지 않은 의견도 무의식적으로 입 밖에 낼 수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방 방송이라니 너무 올드한 단어인가..??) 주변부의 꿍시렁거림이 언제 좋은 아이디어로 발전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혼자 있는 걸 선호하다 못해 프리랜서에 대한 환상을 직장 생활 10년째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내가 대면 회의의 장점을 찾고, 심지어는 가끔 그리워하기까지 할 날이 올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가끔' '그리워하기'만 한다. 재택 짱이다. 줌 미팅도 짱짱.


내일 원래 출근 예정이었는데 한파 특보가 발효되었다는 기사와 함께 웬만하면 재택하라는 권고가 내려왔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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