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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halo Oct 13. 2021

스물세 번째 날.

끝없이 이글거리던 땅, 스페인

A said : 

 

7.15 Reus PM 21 : 48

 

아침 일찍 나서려는 길이 역시나 쉽지 않다. 다니는 기간에 비하면 많지 않은 짐이지만 자전거에 주렁주렁 달기에는 적지 않다. 매일 아침 자전거에 메던 짐이지만 겨우 하루 안 만졌다고 다시 챙기기가 그렇게 귀찮다. 그나마 이렇게 자전거에 그 짐스러운 가방들을 메달 수 있음에 Francois아저씨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웅얼댄다. 출발하는 길에 계속 바르셀로나에 머물 계획인 S군에게 잠시 들러 간다. 숙소에서 느긋하게 나오는 S군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 없다. 더운 날씨에 낑낑대는 형들이 불쌍했는지 간단한 음료수와 요깃거리를 챙겨주는 마음이 기특하다. 안타까운 배웅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바르셀로나를 빠져나간다.


 파리에서도 겪었던 일이지만 워낙 큰 도시이다 보니 빠져나가는데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거리를 계속 지나면서도 이렇게 큰 도시였구나 새삼 뒤돌아보게 된다. 중심가를 조심조심 빠져나가고 길거리가 한산해진다. 거리의 인파도 드물어지고 계속 보던 멋들어진 건물들보다는 푸석푸석한 삶의 터전들이 점점 눈에 띄기 시작한다. 평일 대낮이라 다들 한참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지 교외를 지나는 풍경이 내내 고즈넉하다. 세탁기에서 갓 나온 듯한 옷가지들은 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대문 앞에 보이는 우체통들은 입을 벌리고 꾸역꾸역 편지들을 삼킨다.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서 슬쩍슬쩍 옆으로 보이던 자연이 빚어내는 절경을 볼 때면 감탄하면서 영문 모를 신음소리 비슷하게 내는 일이 많다. 그에 반해 이렇게 같은 사람이 자아낸 광경들은 바라보면 왠지 모를 미소가 입가에서 배어 나온다. 공감의 뜻일까, ‘그래 다 똑같지’ 자조(自照)의 웃음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마음이 편안 해진다. 해변 도시답게 여기저기 비릿한 바다 내음이 스며들어 쓸데없는 군마음의 효과가 배이다. 이 곳의 사람들 역시 같은 류(類) 임을 새삼 확인하면서 그들 어깨에 지워지는 일상의 무게를 살짝이나마 느껴본다. 


 한참 페달을 밟다 바퀴에 바람을 채우기 위해 자전거 가게에 들른다. 물건을 사는 고객님이 아닌지라 워낙에 무심한 주인은 그저 바람 넣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 한참 용을 쓰고 있는데 자전거 여행 중인 한 커플이 다가온다. 말을 붙여보니 독일에서 왔단다. 고향이 괜히 연상되던 튼튼해 보이는 가득 실린 짐들과는 달리 옷차림은 초라하다. 반바지에 짧은 티, 그리고 헬멧조차 쓰지 않고 있는 차림이 멀대 같이 싱거워 보이는 얼굴과 잘 어울린다. 독일에서 이 곳까지 자전거로 왔다고 한다. 힘들어서인지 원래 성격이 그런지 조용조용한 말투에서 그다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괜히 안쓰럽다가도 스스로 타고 온 자전거를 돌아보면 금방 그 생각도 사라진다.


 도심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바닷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콧구멍으로 감겨오는 비릿한 내로만 느껴지던 바다가 두 눈에도 담기기 시작하니 벅차다. 북쪽의 항구 도시인 암스테르담부터 시작해 그저 발을 굴리는 이 페달질만으로도 대륙을 가로질러 또 다른 바다를 볼 수 있게 된 사실이 꽤나 감격스럽다. 여정을 시작할 때 만해도 막막하기 그지없었지만 이제야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호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멋진 절경을 감상하며 한참 어촌들을 지나올 무렵, 계속되었으면 하는 해안길이 언덕에 가리기 시작한다. 그 절경을 가리던 언덕의 초입쯤에서 뒤돌아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의 풍경이 너무나 멋져 잠시 멈춰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펼쳐지는 길은 단순히 한 번 넘으면 그만인 언덕이 아니다. 여지껏 바닷가를 따라 쭉 뻗어 있던 해안도로와는 다르게 도로가 절벽에 둘러 오르락내리락 이어진다. 차도에 기생해 도로변을 겨우 훑어가는 자전거는 더욱더 신경 쓸 일이 많아진다. 넓지 않은 2차선의 도로였기에 까딱 차도를 침범했다가는 자동차들의 무시무시한 경적 세례가 쏟아진다. 언덕을 오르는 것만 해도 허벅지가 터질 지경인데 옆에서 텃세를 부리는 자동차를 신경 쓰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저런 눈치를 보면서 힘겹게 올라가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는다. 잘 넘어가지 않는 페달을 겨우 밟아 넘길 무렵 얼마 남지 않은 오르막길의 도로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안간힘을 쓴다. 도로변에 붙어가기 위해 방향타를 꽉 붙잡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던 터라 좀 더 수월하게 올라가기 위해 도로 한가운데로 방향을 튼다. 거의 다 올라왔겠구나 싶은 순간 갑자기 모퉁이에서 커다란 덤프트럭이 등장한다. 거대한 차체가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머릿속의 사고 회로는 작동을 멈춘다. 트럭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서부터 그 짧은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간다. 일일이 읊으려면 끝이 없겠지만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왜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많은 번뜩임들이 스쳐간다. 다행히 멍한 머리와는 다르게 몸뚱이는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지 급히 방향타를 튼다. 손잡이를 틀었지만 자전거 뒤에 무겁게 버티던 짐들 때문에 금세 기우뚱 넘어지고 덤프트럭 역시 시끄러운 경적소리를 울리며 겨우 반대쪽으로 비껴간다. 살아서 다행이구나 싶은 안도감이 앞서기보다는 뒤에서 올라올 자동차에 방해가 될까 얼른 도로변으로 엉거주춤 기어가는 모습이 스스로 내내 이렇게 왔구나 하고 안쓰러워진다. 겨우 길가로 다다라서야 몸을 더듬어 보며 여전히 이승에 남아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도로 한구석에 퍼질러 앉아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잠시 머무른다. 한참 앞에 있을 T 형을 떠올리며 이런 부끄러운 사고를 티 내지 않게 얼른 따라가야겠다, 여전히 남은 알량한 자존심으로 겨우 페달을 밟아간다.

 바르셀로나를 떠나 오면서 그 다음 목적지에 머물기 위해 Warmshower를 통해 여러 군데 접촉을 한 결과 몇 곳에서 반응이 오곤 했다. 하지만 느긋한 그네들의 성격 때문인지 응답에 걸리는 시간이 꽤나 걸렸고 출발하는 시간까지도 확실히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달리는 와중에도 계속 연락의 결과를 확인해야만 했고 도착하기 1~2시간 전에야 겨우 목적지가 정해진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들이 난무하는 표지판들을 열심히 읽어가며 마을로 접어든다.


 오늘 만나게 될 친구의 집은 도시의 중심가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지 주소를 따라 찾아가다 보니 북적대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밀려드는 자동차와 사람들 때문에 자전거를 타기도 곤란해지다 보니 두 손으로 직접 끌고 주변을 맴돈다. 길거리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주저앉아 하루 일과의 끝자락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그네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친구를 기다린다. 오늘 맞아준 친구는 멋있게 자란 수염이 인상적인 Joan이다. 마초적인 남성미를 뽐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나긋나긋한 미소와 함께 조용한 목소리로 본인의 집으로 안내한다. 남자가 혼자 사는 집답지 않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집 한쪽에는 주인의 취미가 무엇인지 대번 짐작할 수 있었던 자전거 몇 대와 기타들이 뽐내듯 장식하고 있다.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쫓아다니기 시작한 고양이까지 평온한 일상을 물씬 풍기고 있는 Joan의 공간에서 금세 마음이 편해진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던 손님들이 샤워도 하며 더러움의 흔적들을 씻어내고 있던 사이에 Joan은 주방에서 대접할 저녁을 준비한다. 의외로 잘 어울리는 귀여운 앞치마를 매고 주방을 바쁘게 돌아다니던 와중에도 괜히 어색하게 거실을 맴돌던 이방인들이 몹시 허기짐을 눈치채고 간단하게 요기를 하도록 하몽과 와인을 준비해준다. 하몽의 소금기와 달짝지근한 와인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마치 제 몸이었던 듯 흡수되어 금세 길에서 흘린 땀을 보충해 준다. Joan이 준비해 준 저녁상 한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있던 가스파초 gazpacho, 냉토마토 수프는 처음에 봤을 때 식사라기보다 한 끼 다 먹고 입가심으로나 먹을 만한 음식처럼 보였다. 하지만 달달함이 돌면서도 짭조름한 것이 느껴지는 묘한 맛이 계속 숟가락을 당긴다. 크로켓과 빵, 수프, 소박해 보이는 저녁상이지만 길바닥에서 허기로 기어 다니던 뱃속을 어느새 든든하게 채워준다.


 Joan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손님들보다 꽤나 형 뻘이다. 여지껏 만나온 자전거 광 (狂)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자전거를 사랑하는 마음은 단연 크다. 집 한쪽에 있던 자전거 5대를 봐도 알 수 있었듯 고향 주변 곳곳을 자전거로 뺀질나게 돌아다니기도 하고, 며칠을 꼬박 자전거로 달리는 경주에도 참가할 정도로 수준급 라이더이다. 식사를 하며 처음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단단하고 각 잡힌 체구를 보아하니 멋모르고 삘삘 돌아다니던 두 자전거 여행객과는 달리 라이더라는 칭호가 더 잘 어울린다. 동양인이 처음은 아니지만 한국인은 처음이라는 Joan 역시 손님들만큼 이 만남을 상당히 흥미로워한다. 즐겁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여정이 꽤 길어지면서 날씨도 무덥고 다리가 올라가지 않는다고 푸념을 한다. 그리곤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조언이라도 얻을 겸 물어본다. Joan은 그 푸념을 듣고 친동생을 어르듯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는 몸보다는 mind를 control(한글로는 마땅하게 대응하는 단어 가 생각나지 않는다.)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페달을 굴리는 것은 발이 아닌 마음일 것이라 이야기한다. ‘Your legs follow your mind.’ 힘들다고 툴툴대기보다는 즐거운 자전거 여행이라고 마음을 먹어보라고 이야기해준다. 특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나가는 듯한 조언이지만 한 대 맞은 듯 멍해진다. 어쩌면 육체적인 충전보다는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가 고팠을지도 모른다. 조언을 듣고서 잠시 동안 말없이 수저만 이리저리 놀린다. Joan은 한 번 더 웃으며 후식을 내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끝을 모른 채 이어지다 Joan이 내일 함께 일찍 가기로 하면서 겨우 마무리된다.

T said : 

 

DAY 21 

-

오랜만에 감화를 받아서 일기를 쓴다. 

하루 20시간 동안 400km를 라이딩했다는 호스트 후안에게 

무엇이 제일 힘들었냐고 물어보았다.


배고픈 거? 졸린 거? 다리 아픈 거?

란 대답이 나올까 했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다스리는 게 제일 힘들었단다

그리고 말한다. 

'Your legs follow your mind.’

쉽진 않다. 

자전거 타는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근데 후안은 라이딩하는 순간을 즐기지 못했으면 

절대 이뤄내지 못했을 거라고 얘기한다. 


사실 나도 아는 얘기다. 

정말 잘 아는 얘기다. 

그리고 맞는 얘기다.


덕분에 용기가 생긴다. 

다음 달부터 15 일 동안, 2,000킬로, 

매일 2,000미터를 올라가는 라이딩을 떠난다는 후안, 

만약 성공하면 자기 몸에 ‘타투’ 하나 새기고 싶다는 그를 보니, 

용기가 생긴다. 즐거움이 생긴다. 다시 좀 흥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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