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와."
그렇게 파리에 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이곳에 붙들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E와는 15년 지기다. 초등학교 4학년쯤에 만나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 때를 제외하고는 내내 같은 반이었다. 집 방향도 비슷해 등하교를 같이 하곤 했다. 그 당시 우리는 담임들과 자기들이 잘 놀고 잘 나간다고 착각하는 애들을 공통의 적으로 삼았다. 사실 그들 눈에 우리는 띄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르러 우리의 연대는 절정에 이르렀다. E의 반에 J라는 친구가 있었다. E는 J를 싫어했다. 더 정확하게는 혐오했다. E가 말하길 점심시간 후 5교시 사회 시간이었다. 사회 선생님은 이제 막 교생 실습을 마친 풋내기 같았다. 좋게 말하면 순진했고 달리 말하면 좋은 놀잇감이었다. 그렇다고 의욕이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아마 나이도 지금의 나와 비슷했을 거 같다. 지금 생각하니 누구는 어떻게든 학교를 떠나고 싶어 하는데 그 사람은 평생 학교를 다녀야 하는구나 싶었다. 학교가 싫지는 않았지만 왠지 안쓰럽다.
지금 생각해보니 더욱 확실해졌지만 그때도 그 선생님이 초짜라는 걸 대번 느낄 수 있었다. E와는 반은 달랐지만 나 역시 같은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모든 수업은 교과서 순서대로 이뤄졌다. 1장 다음에 2장, 그다음은 3장. 수업 시작부터 종이 울릴 때까지 그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쩌다 누군가 그날의 수업과 상관없는 질문을 하면 그 선생님은 적잖이 당황했다. 다급하게 교과서를 뒤지고는 매우 조심스럽게 답변을 했다. 예를 들어 "그건 아마도 이런 것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네.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몰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확인해보고 다음 수업 때 알려줄게." 자기 답에 확신이 없는 선생님. 그에게 융통성과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칠판에 적는 내용 역시 너무나 '교과서'스러웠다. 모든 글씨는 또박또박, 하지만 교과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판서. 선생을 하기 위해서는 칠판에 글씨 쓰는 법도 배워야 할까? 나에게 칠판에 글씨를 쓰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에게 사회 시간은 쉬어가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많은 애들이 잠을 자고 딴짓을 해도 그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에게는 그날 주어진 단락을 진행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J는 학교에서 알아주는 미친놈이었다. 학교에 안 오는 날이 오는 날보다 많았다. 어쩌다 학교에 와도 자기 마음 내도 들락거렸다. 3교시 중간에, 점심시간 도중에 불쑥 나타나고는 갑자기 사라지곤 했다. 학교 구석에서 다른 애들과 담배를 피우다 걸리기 일쑤였다. 그에게 학교에서 유일하게 재밌는 일은 그때 말로 '찐따' 같은 애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교실 내 사각 링을 만들고는 제일 찌질한, 다시 말해 가장 자존감 없고 자신감 없는 애들 둘을 불러 놓고 둘이 싸움을 붙이는 게 취미였다. 그 둘이 멀뚱히 서있으면 되레 J가 애들을 때리며 싸우라고 지랄했다. 링에 오른 두 아이가 눈물 콧물 범벅에 피까지 튀기며 싸우는 걸 보며 즐거워했다. 그 누구도 이 둘을 대신해 링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아무튼 E의 말로 돌아오면, 점심시간 후 5교시 사회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타난 J는 그날은 왜인지 수업 중인데도 잠을 자지 않았다. 원래 그의 자리는 3 분단 맨 뒷자리인데 점심시간 후 창가 1 분단 맨 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원래 그 자리인 친구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E는 그런 J의 태도가 눈꼴시러웠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러고는 자기는 늘 그랬던 것처럼 책상에 엎드려 자려고 했다. 안 그래도 재미없는 시간인데 그날의 단락은 사회 갈등론이니 사회 유기체론이니 하는 거였다. E는 자기 내면의 갈등과 자신의 신체의 유기체적 조화를 이루기도 바빴다고 했다.
설핏 잠에 든 E는 어떤 냄새에 눈을 떴다. 뭔가 타는 냄새였다. 모기향? 학교에서? 선잠에서 깨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E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1 분단 맨 끝 자리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곳에는 한줄기의 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금세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J가 책상 위라 두 다리를 걸쳐놓고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는 담배를 쥔 손을 창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선생님이 칠판으로 몸을 돌릴 때마다 한 모금 마시고는 창밖으로 내뱉었다. 낄낄낄. 그는 즐거워했다.
E의 자리는 2 분단 앞에서 두 번째였다. 한 분단의 맨 뒷자리라고 해봤자 5번째 아니면 4번째였다. J가 앉은 1 분단은 5번째까지 있었지만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것은 이 교실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황해했다. 더 정확히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설익은 중학생 입장에서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수업 중에 담배를 피운다고? 이 교실의 모든 애들 머리 위에는 정리되지 않은 온갖 무언의 말풍선이 J의 담배연기와 함께 교실 안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이 사실을 한 사람만 모르는 듯했다. 사회 선생님. 물론 모를리는 없었다. 그렇게 냄새가 나는데! 안 그래도 어설픈 선생님은 J가 담배 한 모금을 내뿜을 때마다 가뜩이나 기죽고 더벅이는 말문을 더욱 흐렸다. 그리고 되레 그쪽으로 시선을 안 주려는 그녀의 안쓰러운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선생님이 아무 반응을 안 보이자 흥미를 잃은 건지 J는 담배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는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얼마 후 종이 울렸고 사회 선생님은 교실문을 나갔다.
"완전 미친놈 아냐? 아무리 그래도 수업 중에 그러는 게 말이 돼? 사회 시간에 일부러 그런 거지. 아무 말 못 할 거 알고."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만만한 사람은 그 선생님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할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