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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Sep 01. 2019

여기는 한국이 아니었음을

해외생활의 이중 양상

죽음은 이중 양상을 띤다. 죽음은 비존재다. 하지만 존재이기도 하다. 시체라는 끔찍한 물질적인 존재.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느끼지도 못한 사이 파리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살짝 무료했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할 일이 넘쳐 흘렀다. 프랑스 체류를 위한 서류 작업에서부터 결국 당장은 쓸모 없어진 영어 시험, 그리고 본격적인 프랑스어 어학 공부와 대학원 진학까지. 지난 7월 중순께 대학원 석사 합격 메일을 받으면서 이 모든 과정이 일단락됐다. 마치 어느 대서사시의 1부가 마무리된 거 같은 느낌이랄까? 본격적인 대학원 생활이 2부가 될 테지만.


여하튼 한 과정이 끝난 뒤 약간의 무미건조함이 찾아왔다. "하얗게 불태웠어...!" 후 물밀듯 몰려오는 허무함과 심심함이랄까? 아니면 '슬램덩크'에서 강백호와 서태웅이 마지막 경기(내 기억이 맞다면)에서 땀에 흠뻑 젖은 채 서로를 인정하며 손뼉을 치는 장면을 본 독자의 기분 같다고 해야 할까? 긴장과 감동, 아쉬움 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이 손뼉을 이후로 풀어지기 시작해 "이제 끝이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뒷이야기를 보는 것과 같은 가벼움. 그런 기분이었다고 할까.


물론 해야 할 것은 많다.


당장은 프랑스어. 아무리 프랑스어 시험을 통과했어도 실제 생활과 시험은 엄연히 다르니까. 이제는 주제를 예상할 수 없는 대화에 끼어들어야 하고, 주제를 알아도 펜을 굴릴 수 없는 학교 시험도 치러야 한다. 사람들의 친절함과 별개로 이방인에게는 결코 친절하지만은 않은 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앞서 1부는 이방인으로서 프랑스 사회 경계에 계속 머물 수 있었다면(어차피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어학원에는 나와 같은 이방인들만 있었기도 했고), 이제는 좋든 싫든 진짜 프랑스 안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야 하니까.


이럴 시간에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갔어야... 그래도 에트르타(Étretat)의 코끼리 바위는 멋졌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나약하고 또 나약하다. 사실 '슬램덩크'는 마지막 장면과 함께 책을 덮어버리면 끝이지만 내 일상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 데도 말이다. 마치 1부가 끝났다고 느꼈지만 그것은 결국 2부의 시작에 불과했던 것을.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지만 난 '끝'에만 몰두해 이 여백을 즐겼다. 프랑스어 공부는 "내일부터, 다음 주부터, 다음 달부터"로 미뤄지다 "어차피 학교가며 몸으로 부딪치며 배울 텐데 뭐!"라며 늘어진다. 그러니 무료함을 느낄 수밖에.


무료함이 지나쳤던 걸까? 해외생활에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말았다. 방심. 좋게 말해 이 무료한 시간들을 1부를 위한 휴식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유불급. 당장 주어진 게 없으니 별일이랄 게 있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시간은 순탄하게 잘 지나간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어라? 이곳에 어느덧 적응한 건가?!" 같은 방심의 씨앗이 싹을 텄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내가 지원한 대학은 8월 말부터 행정 등록을 해야 한다. 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하면 주어진 기간 안에 등록비와 각종 서류들을 제출해야 한다. 난 당연히 이 기간에 맞춰 학교에서 연락이 오겠거니 했다. 행정 등록 기간은 언제부터 언제고, 필요한 서류는 무엇이며, 등록금은 얼마를 내면 되고 그런 것들. 연락이 오면 그때 하면 되겠지 하고 룰루랄라 또 시간들을 보냈다.


내가 너무 한국적인 마인드를 가졌던 걸까?


왠지 한국이었으면 학교에서 먼저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을까? 왠지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는 한국이 아니었음을.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고 어떤 면에서는 잘못된 선입견 중 하나인 불친절함의 프랑스였다. 학교로부터 가장 마지막에 받은 메일은 내가 최종적으로 "이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확답을 준 후 받은 "다음은 행정 등록을 해야 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이상한데? 불안함을 느끼고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헉! 이미 행정 등록 기간이었다. 다행히 등록 기간은 한 달 가까이라 무리적인 시간이 부족하진 않았다. 하지만 뭔가 뒤통수를 맞은 거 같은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이 중요한 이야기를 안 해준다고??" 당황함과 당혹감.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던가. 어쨌든 갈증을 느끼고 움직여야 할 사람은 나고, 학교 입장에서는 "그러든 말든 그건 너의 문제지. 밥상까지 차려주리?" 하는 것 같은. 틀린 말도 아닌 거 같긴 하다만.


뤽상부르그 공원의 꽃들도 만개하고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내가 지원한 학교는 행정 등록 때 제출해야 할 서류 중 하나로 지도 교수의 사인이 있다. 즉, 내가 이런 주제로 여기서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싶은데 이를 지도해줄 수 있는지 교수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해 승낙을 받고 그 확인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 것. 헐... 이제 서류 제출 날짜 약속을 잡고 홈페이지에 올라온 서류들을 준비하던 중 갑작스레 맞은 날벼락.


어떤 프랑스 대학들은 학생들이 대학원을 지원할 때 이와 같은 서류를 요구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지원하기 전에 미리 교수들에게 연락해 연구 계획서와 지원 동기서 등을 보내고 약속을 잡아 사인을 받는다. 이걸 지원할 때 같이 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교수가 본인과 안 맞다며 깔 수도 있고 아예 답장을 안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럼 다시 다른 교수를 물색해야 한다. 그렇게 서류 준비를 마치고 지원하고 이것들을 종합해 학교에서 최종적으로 합격 여부를 판단해 알려준다.


근데 나 같은 경우는 지원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합격 통보를 받은 후 이걸 하라는 거였다. 이 학교에 지원할 당시 이런 이야기를 보지 못했고(그런데 나중에 보니 행정 등록 절차 안내에 있었다...) 지도 교수는 학교에 들어간 뒤 찾으면 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등록할 때 지도 교수 사인을 받아오라니! 그렇다면 실제 내가 받은 합격 통보는 합격이 아니라 말하자면 2차전형 통과 같은 거였나? 실제로는 최종 면접 단계가 남은 꼴이니까.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는 "오케이"를 받고도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부랴부랴 교수에게 연락을 보냈다. 지금 주말이 껴있어 그런지 당장 답장이 없는 상황. 솔직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어쨌든 학교에서 서류들을 검토하고 괜찮겠다 싶어 합격 통보를 줬을 테니 상대적으로 쉽게 지도교수를 찾을 수 있을 건지, 아니면 정말 최종 결과를 알 수 없는 관문에 봉착한 건지...


다시 7월 중순께로 돌아가 본다. 그때 너무 쉽게 끝이라 단정했던 것은 아닌지, 후반 추가 시간을 고려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는 후회막심. 그러면 좀 더 빨리 교수들을 알보고 여유롭게 연락을 했을 텐데 하는.


아니면 너무 빨리 방심했던 것은 아닌지, 한국적 마인드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편히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는 한국이 아닌데 말이다. 교수의 답장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너무나 실재하고 있다.


르아브르(Le Havre)도 정말 좋은 곳이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고!


무료함은 이중 양상을 띤다. 무료함은 편하다. 하지만 불편함이기도 하다. 방심이라는 끔찍하게 불편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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