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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Jan 24. 2020

같은 이유, 다른 반응

그것이 현실이니까

정말 오랜만에 파리 한가운데를 거닐었다.


 야속하게도 나는 다시 현실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진다. 낭만 가득한 프랑스 파리도 한 때다. 어느덧 연수로 3년 차에 접어들었고 만으로는 곧 2년 차(이걸 깨닫고 오늘 나와 와이프는 너무나 큰 충격에 빠졌다)가 접어드는 이 시점, 이곳은 엄연히 나의 현실이고 삶이다. 


 언제부터라고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이곳은 "즐기자!"가 아니라 "살아남자!"가 더 커진 거 같다. 아마도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 아등바등이 더 커진 거 같은데, 낙제를 하면 안 되겠고, 수업을 알아들어야겠고, 조별로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데 자기 혼자 덜렁 과제를 제출하는 조원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다 보니 그런 거 같다. 물론 내 경험들만 가지고 이곳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극한의 상황을 경험하지도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우리는 우리의 경험들에 비추어 생활하니까. 내 경험이 전부고, 그것이 고통이고, 전부니까.


 아직 겨울 한가운데라 그렇기도 하지만 이제 초반의 여유는 점점 더 옅어져 간다. 한 때 우리는 이곳에 있는 김에 누려야지 않겠어라며 이곳저곳을 꽁지 빠지게 돌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당장 눈앞의 과제를 해야 하고 논문 걱정이 최우선 순위에 올라섰다. 학기가 끝나고 짧게나마 방학을 맞이했음에도 우리는 고작 하루 몽펠리에를 갔다 온 게 전부다. 


 물론 이 역시 누군가가 보기에는 굉장히 복에 겨운 소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에게 있어 전부는 나의 상황이다 보니 솔직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한다. 그저 "이러자고 온 프랑스가 아닐 텐데" "왜 내 실천을 의욕을 따라가지 못하니..." 하는 한탄만 늘어진다. 근데 또 무서운 것은 이런 것에도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익숙한 듯 낯선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얼마 전 와이프가 한 말이다. 아무래도 둘 다 석사를 하다 보니 어쩌다 한 번 각자의 지도교수를 만나 논문 진행과정을 점검하고 보완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말하자면 지도교수와 면담이다. 그녀는 면담을 앞두고 철두철미하게 준비한다. 지금 논문 과정이 어떻고, 어디까지 준비가 됐으며, 이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마치 보고서 제출하듯 정리하고 작성한다. 거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듯(실제 그녀는 면담을 위한 그래프까지 만들어 갔다) 말할 것들을 직접 써가며 준비한다. 


 그에 반해 나는 뭐랄까 좀 덜 체계적이다. 물론 나 역시 논문이 어디까지 진행됐고, 같이 논의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이며, 어려운 점들을 정리하고 준비해 간다. 다만 그것들을 세세하게 준비하기보다는 간략하게 요점들만 머릿속으로 정리해서 간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상반된 태도에는 역설적이게도 같은 이유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로 말을 할 수 없어서다. 한국어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인데 이것을 프랑스어로 한다는 건 정말 고통을 넘어 치욕스럽기도 하다. 내 생각을 온전히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건 상대가 잘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염려를 넘어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거야? 이것도 표현을 못하나?" 하는 수치심으로 이어지기 일수다. 그런 심리에서 그녀는 어떻게든 더 잘 전달하고 표현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이고, 반대로 나는 그렇게 해도 안 될 것을 알기 때문에 좀 더 마음을 비웠다고 할 수 있다.


안녕, 달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의사소통을 포기했다거나 논문을 때려치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명확히 정리하고 인지한 상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내용에 따라 발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도교수와 면담은 말 그대로 논의와 대화기 때문에 항상 내가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어지곤 한다. 나 역시 처음에는 감탄사 하나까지 준비해 갔지만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더 중요한 건 내 논문의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아무리 의사소통이 어려워도 어떻게든 논의는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는 거라고 믿을 뿐이다.


 아무튼 그녀 역시 면담은 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교수가 괜히 교수인가! 지도교수는 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내서 느닷없이 급소를 훅 치고 들어온다. 


이건 뭐니? 저건 어떻게 됐어? 이건 이렇게 해보는 게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그러면 우리는 "아...(생각 고민) 그건 말이에요 (생각 고민)..." 이렇게 몇 분을 "음..."으로 때우며 시간을 벌며 말할 거리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건 항상 그렇듯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녀는 그런 본인의 모습이 꽤나 사무치는 거 같다. 그리곤 복기를 하며 "그런 간단한 질문에도 답을 하지 못했어!"라며 자신에게 분개하곤 한다. 그러곤 본인이 저지른 간단한 문법 오류나 표현의 애매함을 되새기며 이불킥을 하곤 한다. 


 반면 나는 면담을 마치고 나면 그녀에게 전화해 마찬가지로 "악!! 이렇게 밖에 말을 못 했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하며 한참을 쏟아내지만 그러고 나면 끝이다. 또 이 과정을 몇 번 거치고 나니깐 내 반응도 그 수위와 강도가 낮아진다. 흔히 말해서 철판이 두꺼워지고 낯짝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랄까.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그녀는 나의 능글맞음 혹은 태연함에 놀라곤 한다. 아마도 본인보다 덜 스트레스를 받는 거 같으니 그게 어떤 면에선 부럽기도 한 거 같다. 


그래도 지도교수와의 면담을 바로 직전은 너무나 긴장된다.


 물론 그렇다. 처음과 비교해 점점 더 스트레스의 강도는 낮아지고, "별 수 있나"하는 마음이 커지는 게 사실이다. 물론 나 역시 면담 내용을 돌이켜보면서 고쳐야 할 것들을 찾아낸다. 다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나 고통에 대한 민감도가 예전 같지 않을 뿐이다. 아마도 그건 내가 이 상황에 길들여졌고 또 내 현실이기 때문일 거다. 이 모든 것 하나하나에 반응하기엔 너무나 많은 난관이 있고 이는 마치 맨발로 몽돌 해변가를 달리기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일 테다. 


 이런 나를 보며 문득 놀라게 되는 건, 이 두꺼워지는 뻔뻔함의 철판에 나의 수치심만 가려지는 게 아니라 앞서 잠시 품었던 낭만까지 가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다. 뭐 낭만이 배부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논문을 써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느끼는 것은 역시 무엇이 됐든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가짐인가 하는 거구나 하는 뻔한 결론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이 익숙함, 혹은 길들여짐이 냉소와 자기태만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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