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늘 이상하게도 간절히 바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맥락 없이 느닷없이 다가와 귓가를 간지럽히곤 했다. 이날도 그랬다. 아침나절을 침대에서 뒤척였는데 잠은 그를 매몰차게 외면하더니 낮이라고 할지 오후라고 할지 애매한 4시께 불현듯 찾아왔다. 아마도 기억이 맞다면 4시쯤일 거다. 왜냐하면 늘 이 시간에, 특히 매주 토요일마다 옆집에 사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그는 그녀가 학생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가 삑삑 삐리릭 소리를 내는 도어락을 울리기 때문이다. 그러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그가 사는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4개월째 고장이다)가 들리는 걸로 봐서 아마도 그 시간에 집을 나서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 그는 잠을 설치다가 담배까지 떨어지면 아침 9시께 건물 앞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가곤 했다. 이 습관은 일종의 사회적 마스크 같은 건데, 그가 생각하기에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담배를 사러 가는 건 지금 그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라고 여겼다. 할 일은 없고 불규칙적인 알바를 하면서 먹는 건 대충 때워도 담배는 피워야겠고 남는 시간은 인터넷 게임으로 죽이는 그런 현실 말이다. 그는 그런 본인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외면하지도 않지만, 이 패턴은 최후의 보루처럼 남겨두고 있다. 뭐라고 딱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약간은 자존심의 문제기도 하고, 되레 이렇게 의식적인 행위를 함으로 해서 본인의 현실을 더 자각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그렇게나마 타인(그래 봤자 주기적으로 바뀌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뿐이지만)에게 그 자신 스스로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집을 나서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종종 옆집 여자와 마주치고는 했다(아마도 퇴근길인 거 같았다). 그때마다 그는 인사를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고는 했다. 어떤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바로 집 앞에 있는 편의점이긴 하지만 거기서부터 그와 그 여자의 집이 있는 3층까지 동행하는 순간들이 매번 어색하기 때문이다. 고장 엘리베이터를 보며 둘은 동시에 혹은 잠깐의 시차를 두고 한숨을 내쉬고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본인의 위치를 어디다 둬야 할지 너무 어려웠다. 뒤에 있자니 시선을 두는 것도 애매하고 그러다 보면 그녀도 괜히 불안감을 느낄 테고, 앞에 있자니 그 역시 바로 뒤 지근거리에서 누군가 따라온다는 기분이 마냥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밑에 있는 것도 서로에게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번 거의 나란히 섰다시피(안 코스에 있는 사람이 반걸음 정도 앞에선) 같이 올라가곤 했다. 이미 자리가 그렇게 잡아지면 앞서갈 수도 뒷걸음칠 수도 없다. 이미 둘은 흐름을 탔기 때문에 그 리듬을 깨는 것 자체가 굉장한 실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건 그와 그녀 사이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고, 그 둘은 이웃이라 해야 할지 생면부지라 해야 할지 애매한 그 정도의 사이였다. 그리고 또 그녀는 매번 이 시간에 집을 나섰고, 그가 잠에 들무렵 그 소리를 들은 거 같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오후 5시 30분쯤이었다. 약속 장소인 잡화점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이니 늦지는 않을 거 같다. 사실 그는 약속시간에 늦어도, 혹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나중에 그날처럼 우연히 마주치면 몸이 아팠느니,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등의 핑계를 대면 그만이었다(사실 그는 그의 휴대전화 번호도 몰랐다). 더군다나 둘 사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볼 날보다 안 볼 날이 더 많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오늘의 만남은 서로에게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오히려 흰 티셔츠에 묻은 검은 볼펜 자국처럼 서로의 일생에서 더욱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러니 흰 티셔츠를 가장 깨끗하게 보관하는 방법은 아예 입지 않는 것, 그러니 사지 않는 것처럼, 둘 사이의 관계를 가장 깔끔하게 하는 것은 애초에 보지 않는 건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코 걸어 나가기로 마음먹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역시 타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가리는 사회적 마스크를 쓰는 것과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예상하는 방향과 전혀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그를 향한 판단에 예외 변수를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다시 그 스스로 본인의 현실을 오롯이 자각하는 것, 이날의 만남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만 대충 정리하고 50분쯤에 집을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지 봤는데 역시나 고장이었다. 늘 그렇듯 한숨을 한번 몰아쉬고 계단을 내려가려는 찰나 익숙한 전자음 소리가 들렸다. 옆집에서 나는 그 도어락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소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예상하지 못한 낯선 환경에 놓였을 때 나타나는 그런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옆집에 또 다른 사람이 살았나? 금시초문이지만 불가능할 건 아니지. 아까 그 소리는 그 여자가 나가는 게 아니었나? 사실, 잠결에 들은 소리니 잘못 들었을 수도 있지. 아무튼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나름의 답을 고민하고 있었다. 답은 빨리 내려졌다. 사실 문이 열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몇 초면 충분했다. 그러고 답은 나왔다. 그 집에서 그가 오늘 만나기로 한 그가 나왔다.
"젠장"
그는 자기도 모르는 게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 역시 예상과 다른 환경에 놓였을 때 나타나는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는데, 그와 이토록 빨리 만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는 그의 말을 못 들은 듯했다. 어쨌든 옆집 여자와 계단을 같이 올라갈 때도 속이 거북했는데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야 하다니. 그나마 그녀는 아예 모르는(그냥 옆에 살 뿐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는 사이)지만 그는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다. 달리 말해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와 상관없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거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그는 그와 함께해야 했다. 만약 지금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약속 장소로 가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고, 아니면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 얼추 개요라도 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너무나도 무방비 상태로 독성가스에 노출된 거 같았다. 몰랐던 척 내려갈까? 그러기엔 이미 눈이 마주쳤다. 그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이날의 약속을 잡았던 지난날의 자신을 가혹하게 자책했다.
"어?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그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 나 여기 살아"
"진짜? 여태껏 그걸 몰랐네! 왜 몰랐지? 아, 여긴 여자 친구 집이거든. 그래서 종종 들렀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았나 보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침 9시경 담배를 사러 가거나, 어쩌다 들어오는 불규칙한 잡일을 할 때 말고는 집에만 있으니까 말이다. 그가 이곳을 자주 들렀다는 걸 알고는 차라라 지난번 잡화점 앞에서 마주쳤던 거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오늘 최악의 순간을 맞았다. 마치 온몸으로 빨아들인 독성가스가 반응을 일으켜 모든 피부조직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으며 그런 시도조차 무의미해졌다. 그의 유일한 보금자리가 누군가에게 걸리고 말았으니까.
"그러게"
"그럼 같이 가자. 어디 갈래"
그는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갈 수도 없다. 어쨌든 어딘가로 그는 빨리 가고 싶었다.